파주 감악산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행복과 불행의 비율을 따져 볼 때 당연히 불행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행복하고 싶은데 왜 인생이 불행했을까. 그 이유가 뭔지 질문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삶이 원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것 같습니다. 내가 기대하거나 원했던 부분들이 현실에서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거죠.
존중받는 주체로서 살고 있다는 기분을 느낀 적이 대체로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원하는 바대로 삶의 초점을 맞춰야 하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내가 몸담고 있던 가족공동체와 학교 안에서의 질서, 직장이라는 집단이 저를 마치 생명 없는 꼭두각시처럼 취급했죠.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주위에서 하라는 대로 그들이 제시한 틀 안에서 순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게 반항하지 않는 자세로 어느 정도 그들의 지시에 따라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갈구하는 수많은 욕망과 본능, 본성을 억눌러 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하고 내게 필요한 걸 함부로 가지지 못하게 했죠. 거기서 오는 결핍에 대한 충족 욕구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의 삶의 과정은 채우지 못한 욕구를 채우기 위한 끝없는 도정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앞뒤 상황 고려하지 않고 자행되는 타자 혐오나 상식을 넘어선 익사이팅 한 행위에 빠져들고 경제 사정을 위협할 정도의 무분별한 소비행위를 탐닉하는 등 여러 모종의 자극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도 오랜 세월 축적된 결핍 욕구를 채우려는 왜곡된 자기 보상 행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자기만의 주관과 생각, 의견으로 만들어 놓은 틀 안에 나를 가두고, 그렇게 그들의 시선과 주문에 따라 본성을 억압하다 보니 끊임없이 결핍에 대한 충족 욕구를 갈구하는 상태에 놓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그 결핍 욕구를 채우려는 성취 행동이 좌절되었을 때 오는 상실감에서 더 크게 기인하기도 했던 것 같고요.
그래서 삶이 생각보다 많이 힘겨웠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애초에 제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가 제가 원하는 바대로 바뀌지 않게 구조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절대적으로 말이죠.
근데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 같아요.
태어날 때부터 가족 공동체나 집단 내의 공동 가치관에 따라 요구되는 저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 모습에 부합되기 위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보편적 행동양식 안에서 행동하도록 스스로를 규율해 왔죠. 저뿐만 아니라 그 누구든지 자신이 속한 집단 내 규범이 제시한 특정 이데올로기에 속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과 논리가 안 통할 정도로 특정 어젠다에 자기 자신을 몰아적으로 일체화시키며 살아가고 있기까지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지향하는 종교 교리에 복종하며 평생 욕망을 억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부장제와 유교적 문화 규범에 삶과 가치관 전체가 종속되기도 하고, 어떤 정치적 신념 안에 갇혀 끝이 나지 않을 정쟁 속에 계속 자신을 내던져져야 하는 상황도 있는 거죠.
그러다 보니 이 사회에서는 저마다 각기 다른 공동 가치관에 따라 요구되는 개인의 정체성이 존재하게 된 것 같아요.
개인을 위해 사회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를 위해 저라는 개인이 만들어진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의 제 의식은 어쩌면 억압적이고 통제적인 집단의 통합된 의지가 점거한 ‘나’ 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나를 통해 자신들의 결핍 욕구를 채우려 한 부모와 숨 막히는 좁은 교실 안에 학생들을 몰아 놓고 감시한 교도관 같은 선생님들이 제 정체성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끊임없이 개조하려 했던 것처럼요.
지금도 물론 다른 내밀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사회의 틀에 맞게 저마다의 의식이 개조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각 개인을 기만하는 집단의 시스템은 아무래도 누구도 쉽게 눈치채지 못할 만큼 치밀하고 정교하죠.
이 세상의 요구에 정직하게 복무함으로써 만들어진 지금의 제 정체성이 정말 진정한 나일까 의심이 듭니다.
내 정신 안에 내밀히 심어지거나 스며든, 원래의 나의 본성과 상관없는 집단의 사상이 내 스스로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들도록 인지 착각을 유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순전히 내 주체 의지의 발로라고 전제하고 있던 생각과 행동들이 결과적으로 내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가 주입하여 빚어낸 결과가 아닐까.
아무리 훌륭한 규범과 이데올로기라고 하더라도 저는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 또는 나와 무관한 타자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요즘 듭니다.
특히 다른 이들의 검증되지 않는 주관적 세계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많이 답답해서 견디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제가 이상한 걸까요. 제가 다른 이들과 달리 쓸데없이 많이 특이한 걸까요.
결국 이데올로기, 전통 관념, 특정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가 만들어낸 집단논리 안에 갇혀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 테니까요.
이 전체주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적인 몸부림이 앞서 내가 말한 자기 결핍에 대한 보상 요구 형태로 여태껏 기이한 형식으로 얼굴을 드러낸 게 아닐까.
그렇다면 언제쯤 이 세계로부터 부여된 나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길을 따라가고 걸어봤지만 문득 저는 제 심리를 지배하려 했던 그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던 게 아닐까. 오히려 그토록 내가 싫어하는 그들과 동일시되어 가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내 의식이 누군가의 특정 관념에 의해 종속 돼왔듯이 저도 다른 이를 제 신념으로 지배하려는 정체성을 저도 모르게 전개해 왔다는 사실을 여태껏 간과해 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거죠.
아마 저도 모르는 사이 알게 모르게 그렇게 해 왔을 확률이 높을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그러고 있을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