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18코스
언제부턴가 제 자신을 잘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 워낙 역풍을 많이 맞아 와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직접 마주한 다양한 삶의 이슈와 인간관계가 내 맘 같지 않았던 때가 많았거든요.
사태를 다면적으로 조망하지 못하는 제 인식능력의 생래적 한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시각각 저를 사로잡는 기억 이미지와 생각의 메커니즘이라는 기초적인 두뇌 작용 역시 완전히 믿을 게 못되고요.
저는 분명히 집 안의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고 생각하거나, 가방 안에 어떤 물건을 넣고 회사에 도착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확인해 보니 아니었던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반대로 가져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가방을 열어보니 생각지 못한 그 소지품이 들어있는 사실을 알게 된 경우도 있었고요.
기억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떨 때는 내가 한 행동이나 내뱉은 말을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고 내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언행들이 객관적 자료와 제3자에 의해 사실로 밝혀진 경우도 있죠.
불과 몇 시간 전에 일어났던 상황이라도 다시금 그때와 똑같이 영상 보듯이 완벽하게 머릿속에서 재현하며 기억해 내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사태들이 추측과 어림짐작으로 만들어낸, 내 편향된 관점이 빚어낸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저는 저의 기억을 진짜라고 믿고, 저의 생각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전제하고, 제 판단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니까 두뇌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분명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그 사실이 어렴풋해지면서 새삼 망각하는 거죠.
이 망각 작용 역시 인간으로 태어나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두뇌 고유의 생래적 특질에서 비롯되는 한계일 수도 있을까요.
이처럼 제 두뇌와 판단은 불완전합니다. 한 마디로 내 의식 작용은 불안정합니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완벽해지지가 않더라고요. 그래서 세상에 떠도는 주관이 완전히 소거된 순수한 객관이라는 말도 불완전한 의식이 창조해 낸 허구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모든 사물과 사태에 대해서 애초에 내 의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 세상에서 완전한 객관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날이 갈수록 더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상대방에게 의견을 관철하고 입장을 밝히는 데 있어 가끔 주저하게 됩니다.
내 경험과 판단으로 누군가의 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당연히 불완전한 행위일 테니까요.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많은 이들이 자신의 판단이 완전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전제하며 순간순간 저를 향해 의견을 관철하려 했던 것 같아요.
그건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고요.
저는 보통 저의 편향된 독자적 관점 안에 수시로 함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늘 나의 배경과 경험에 의한 관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완벽히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무심코 무엇을 경험하거나 어떤 것을 바라볼 때도 그게 나의 기호와 성향에 부합하는지를 은연중에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정신 외부에서 관찰되는 여러 사태들을 자기 동일시 관념 안으로 포섭하려는 자기애적 의식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자기애적 관점을 통해 외부 사태와 사물에 나만의 의미 즉, 자기 지향성을 부여하는 거죠. 그렇게 타자와 구별되는 나만의 입장이라는 걸 가지게 되고 그 순간 자기 주관성, 즉 관점이라는 감옥 안에 갇히게 되는 패턴을 답습하게 되는 거죠.
왜 매번 나는 완전하지 않은 내 주관적 기억과 경험을 우선적으로 신뢰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걸까. 왜 객관적이지 않은 불안정한 주체 안에 함몰되는 걸까. 왜 나의 두뇌가 일으킨, 순전히 개인 감각적인, 완벽히 신뢰할 수 없는 나만의 생각과 감정 안에 수시로 정체되는가. 왜 끊임없이 유사 환각과 확인되지 않은 망상을 일으키는 의식의 도식 작용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왜 불완전함을 자각하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이 모든 삶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최소 내 입장에서는,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축적한 나만의 고정관념 안에 포위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는 것인가.
저의 편향된 관점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그 벗어나려는 행위 자체가 또 다른 관점으로의 이동으로밖에는 다른 탈출로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또다시 두뇌가 가지는 도피적 지향성의 한계에 가로막히게 되는 운명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경험과 지식으로 형성된 자기 주관의 세계에 갇힌다는 건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객관’을 상정하고 판단하는 관찰자인 주관인 ‘나’가 존재하는 한 완전무결한 객관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계속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불완전한 두뇌로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을 겪게 되는 게 이 세계에 던져진 저의 불가피한 운명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