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쌓이고, 행복은 마음에 새겨진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살면,
결국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2024 파리올림픽 양궁 대표팀의 멘털 코치로도 유명한 연세대 김주환 교수는 최근 유퀴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그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좋은 곳에 놀러 가도, 인스타에 올릴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하면 짜증부터 났습니다. 과거 제 삶은 이미 누군가에게 보이는 삶, 그 틀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인스타그램을 지웠습니다. 구속과 제약의 족쇄가 풀린 것 같았어요. 화면 속을 예쁘게 꾸미는 대신,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유로움 속에서 진짜 저의 사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강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태어나 한 번도 발을 디뎌본 적 없던 곳을 가족과 함께 누볐습니다. 순천의 드넓은 갈대밭과 하동의 차밭을 지나는 바람까지. 거제도에서는 배를 타고 외도를 다녀왔고, 목포에선 보트를 타며 항구 도시의 여유로운 풍경을 만끽하며 여유를 즐겼습니다.
그런가 하면 톱머리해수욕장 같은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친 즐거움도 있습니다. 꽃지해수욕장에서 바다를 처음 보고 눈을 반짝이던 지안이의 모습은 제 마음 깊숙이 새겨졌습니다.
여행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남깁니다. 아기와의 여행은 전지훈련과 비슷하게 전지육아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설악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자마자 지안이가 배고프다고 울었고, 급히 분유를 꺼내 달래주던 기억. 유모차를 거부하며 울던 지안이를 품에 안고 이동하던 날의 땀과 한숨. 분유 한 통을 모두 쏟아버리고 남편과 휴게소에서 투닥거리던 일까지, 지금은 모두 추억이 되었습니다.
봄이면 유모차를 끌고 서울숲으로 향했습니다. 우는 아기를 달래며 안기도 하며 유모차를 끌고 50분이나 걸려 힘들게 갔습니다. 가는 과정이 힘들어도 막상 도착하면 좋았거든요.
넓고 익숙한 공원 곳곳엔 지안이와의 추억이 쌓여있습니다. 너른 들판에서 공놀이를 하고 비눗방울을 불며 웃던 지안이의 얼굴, 놀이터 모래사장에서 흙을 만지며 행복해하던 손. 그렇게 한참을 놀다가, 돌아오는 길엔 늘 택시를 불렀습니다. 50분을 걸어가서 5분 만에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은 묘하게 뿌듯합니다.
사실 꼭 저 멀리 목포나 서울숲까지 가지 않아도 행복한 순간은 찾아왔습니다. 오늘처럼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면, 아파트 단지에서 지안이와 눈썰매를 끌고 뛰놀았습니다. 하얀 눈을 손으로 만지며 작은 눈사람을 함께 만들었어요. 가을에는 단지에 감나무에 열린 감을 세어 보았고, 봄에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솔방울을 주었습니다. 일상 속에서, 익숙하고 가까운 곳에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지안이와 함께 알게 되었습니다.
익숙한 동네에서, 때로는 낯선 곳에서. 사계절을 느끼며 가족과 보낸 시간들을 통해 저의 우울감은 조금씩 치유되었습니다. 더 이상 보여주기 위한 삶에 매달리지 않고, 온전히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네 살인 지안이는 이미 수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안이가 보고, 듣고, 느끼며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저도 조금씩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