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퇴 후, 맥주+수다
생리 중인 몸은 중력의 영향을 더 받는 것 같다.
유난히 공기가 무겁게 어깨 위에 내려 않는 아침이었다. 결국 평소보다 늦게 하루를 시작했다. 새벽에 지율이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뒤척이다 알람을 끄고 다시 자버린 탓이다. 유치원 등원 시간을 맞추기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지안이의 애교 섞인 장난에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 아침이었다.
지율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쉬려던 찰나, 2주 전에 예약해 둔 필라테스 수업이 생각났다. ‘아..!’ 깊은 탄식과 함께 얼굴이 구겨진다. 적지 않은 돈을 내고 등록했는데, 첫날부터 빠지면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운동을 가지 않고 쉬면 더 깊은 자기혐오에 빠질 것 같았다. 게다가 우울할 땐 밖으로 나가 몸을 움직이라는 말을 어딘가서 들었다. 운동을 하면 도파민, 아드레날린이 나온다지? 그런 기대도 했는데, 오늘은 에스트로겐이 이겼다. 역시 몸이 지칠 땐 쉬어야 기분이라도 나아진다.
운동을 하고 나니 오히려 더 지치고 피곤했다. 배는 고팠지만,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이들 방해 없이 맛있는 점심을 만들어 먹는 게 거의 유일한 낙인데. 먹보가 먹는 걸 거부하면 정말 심각하다는 거다.
점심을 건너뛰고, 지안이 하원 후 병원에 다녀왔다. 호캉스를 다녀온 뒤 맑은 콧물이 나왔는데 다행히 괜찮단다. 하지만 나는 괜찮지 않은 게 문제였다. 지안이 지율이와 놀이터에서 놀다, 지안이 친구 집까지 갔다가 집에 와서 목욕시키고 저녁을 먹였다. 이쯤 되니 넋이 나갔다. 잔소리할 힘도 없고, 표정도 사라진다.
마지막 일과로 지안이를 재우기 위해 터덜터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까 내가 했던 말을 들었는지, 지안이가 말했다.
“엄마, 월요일엔 안방 청소하고~ 화요일엔 거실 청소하면 되지 않아?”
위로는 예상치 못했을 때 더 큰 힘을 준다. 대문자 T 엄마를 똑 닮은 딸의 위로에 처음으로 입가가 씰룩인다. 내 기분을 살피며 아기자기한 애교 섞인 목소리로 조잘조잘 대는 작고 귀여운 이것이 나를 미소짓게 만든다. 딱딱하게 굳었던 빵이 전자레인지에 들어갔다 나오면 모락모락 연기가 나며 포송포송 해지는 것처럼. 하루 종일 긴장으로 경직됐던 몸이 그제야 사르르 녹았다.
지율이 까지 재우고 다시 거실로 나와 쌓여있는 빨래를 개다보니 다시 넋이 나간다. 남편도 말없이 유튜브를 보며 설거지를 했다. 빨래 옆에 틀어둔 40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이 끝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남편이 맥주 한 잔을 제안했다.
ㅡ피곤할 때 맥주 마시면 안 되겠지?
ㅡ집에 없는데?
ㅡ사 오면 되지
졸리고 피곤했지만, 그 마음이 고마워서 애교 섞인 제안에 응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절반쯤 해결된다.
남편과 사소한 이야기, 별거 아닌 이야기들을 나눴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더 타고 싶다며 드러누워 울었던 지안이, 이유식을 반 이상 남겨버린 지율이, 그리고 10분이면 끝낼 일을 지안이가 1분마다 불러서 40분 걸린 이야기까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얽혀있던 마음이 풀린다.
ㅡ오늘 하루 종일 혼자서 힘들었지.
남편이 나를 꼭 안아줬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 위로가 필요했구나.
오늘은 나라도 나를 안아줘야 하는 날이었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족들 챙기느라 스스로는 돌보지 못했다. 또, 막상 나만 가족들을 챙기는 줄 알았는데,
가족들도 나를 알아차리고 마음을 쓰고 있었구나.
위로가 오니 견뎌야 했던 하루가 열심히 살아낸 하루로 바뀐다. 오늘 하루 나 자신 폭삭 속았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