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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Mar 15. 2019

시월 단상

숲 속으로 가는 흰 개



늦잠을 자겠노라 하는 것은 쉬는 날의 의무입니다. 그리하여 난 알람도 끄고 열심히 잡니다. 잠으로 오전을 전부 탕진하면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낭비하는 재미가 어찌나 즐거운지, 한 것 없이 빈 시간이 가장 충만합니다. 느지막이 일어나 밀린 빨래를 하고 책을 읽고, 마음이 내키면 알아봐 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친구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쉬는 날은 마음대로 잘되지 않네요. 어쩐지 눈이 더 일찍 떠지고, 그 김에 빨래를 하긴 하는데 그건 세탁기의 몫이라 나는 공허하게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 오늘은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지. 다른 것은 몰라도 오늘은 바깥에 나가 힘껏 걸어야지.



이어폰이 고장 났다. 그건 포르투갈에서 산 것이었다. 나는 산티아고까지 육백 킬로 미터쯤 걸어야 했는데, 혼자 걷는 길이 너무나 쓸쓸할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비싼 값을 지불했다. 무선이라 좋다며 추천한 직원의 말도 한몫했다. 누구의 목소리라도 들어야 했고, 매일 몇 시간은 꼬박 이어폰을 달고 지냈다. 고요한 수풀의 소리도 오랜 시간 들으면 지치는 것이라 이어폰에 많이 의지했다. 이어폰은 땀에도 많이 젖었다. 하루는 흘러내린 땀이 이어폰에 전부 달라붙어서 말라버린 뒤 하얗게 되고 말았다. 분명 땀에서 나온 염분인데, 말로만 들었지 너무나 궁금해 혀를 대어 보기도 했다. 짰다.


살갗에 부대껴 고장 났을 것이라는 생각과 다르게, 배터리 수명이 다 한 것이었다. 오래 사용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렇다 하였다. 그러나 깜빡거리는 불빛은 내게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면 몇 분 뒤 그 빛마저 사라지겠지. 그리고 다시는 켜질 일이 없다. 낯선 외국인의 손에 들려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 죽음을 앞둔 이어폰을 바라보노라면, 내가 지내온 시간을 돌이켜 떠올릴 물건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에 숙연해진다. 그건 비단 이어폰만 그런 게 아니다. 불빛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오랜만에 탄 버스는 어지럽다. 멀미였다. 언제나 여행 중 나의 자랑은 멀미를 하지 않는 몸이었는데, 메스꺼움이라니. 목 뒷덜미로부터 올라오는 멀미에 오래도록 숨을 골라 쉬어야 했다.


익숙하여 단련된 것들은 고작 며칠만 이어하지 않아도 곧장 나를 떠났다. 몸 쓰는 일에 관련한 것이 그랬고, 잃어버린 여러 기술이 떠올랐다. 나는 서예를, 또는 피리 부는 법을, 배드민턴의 다양한 응용기술을, 여행하며 쓰던 스페인어를 어떻게 했던가.


난 나를 연민하는 것이 습관이 될까, 머리를 털털 털어 연마하고 있는 것에 집중한다. 그럴싸한 요리의 방식, 사랑, 비판적 책 읽기, 꾸준히 쓰는 글. 멀미가 멎는다.



아주 늦은 밤이었다. 진작 패딩을 꺼내 입어야 오토바이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내 몸은 시월부터 두툼했다. 한 밤의 시골길은 적막하고 엔진이 왕왕 거리는 소리뿐이다. 작은 전조등 하나에 의지하여 달리는 것은 속도를 낼 수 없는 일이라 냉기를 참으며 천천히 달려야만 한다.


길 한복판에 들개 하나가 앉아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빛없는 길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내가 괴물의 창자를 통과하는 기분이 들곤 했는데, 구불구불한 곳에서 특히 그랬다. 빠른 속도의 관성과 내가 사라지면 나는 어디를 지나가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개는 그런 나를 멈춰 세웠다.


흰 개의 눈은 달빛만큼 밝은 것이라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오토바이를 멈추었다. 하마터면 치일 뻔했는데도 개는 평온한 표정으로 달을 보고 있었다. 시동을 껐다. 다시 고개를 돌려 달을 바라보는 개의 목을 따라 눈을 돌렸다. 달은 구름 사이로 끼어 있음에도 달무리를 짓고 있었다. 무지갯빛 원이 달을 감싸고 있는 모습.


흰 개는 터벅터벅 걸어 숲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시동을 걸었다. 잊고 있던 냉기가 다리를 파고들었다. 난 그 잠깐, 누구를 앞에 두고 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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