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29번의 크리스마스 - 8 뉘른베르크
꼭 8번의 잠, 두 번째 도시에서의 여덟 번째 크리스마스
뉘른베르크에 있는 동안 가장 맑은 날
카이저부르크 Kaiserburg에 오른다 이건 그제 밤, 언덕을 올라올라 성벽을 따라 다다른
성의 이름이며 낮의 특별함으로 재회하겠다고 다짐했던 그 밤의 약속을 지키러 가는 것이다
잠깐 들렀을 땐 몰랐던 성의 크기와 넓이, 단단함 가운데 아기자기한 디테일,
구석구석 돌아보는 시간이 내내 흥미롭다 하나도 놓치기 싫어 쉬지 않고 사진기를 들이대는
관광객 모드가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
그 마음을 공유하고 싶어 올리는 사진은 전부가 아닌 일부일 뿐이다
성을 나와서는 올라왔던 길과 반대 방향으로 난 길을 택해 내려온다 걸음이 느려진다
올드타운의 모든 골목골목을 후벼 파고 다니는데 오전 시간을 전부 할애할 만큼
숨어도 있고 드러내 놓고도 있는 오래 잘 보존된 아름다움을 좀처럼 쉽게 지나칠 수 없다
늘 들고 다녔던 여유분의 메모리카드를 하필 오늘은 놓고 온 자신을 여러 번 꾸짖는다
성벽이 끝날 즈음의 올드타운 한 귀퉁이를 돌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한다
원두를 직접 로스팅해서 커피를 내려 주는 귀한 카페를 만나다니
기분이 최고조에 이른 맑은 날의 오후, 카페에서의 커피 한 잔
올드타운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아름다운 발견, 커피, 휴식
조금 늦어진 점심을 먹기 위해 중앙광장으로 향했다
호스트가 추천해 준 두 개의 유명한 레스토랑 중 한 곳인 이곳은 마켓을 구경하며
여러 번 지나쳤던 곳이었고 소시지 맛집이었다 그래, 우리는 아직 소시지가 질리지 않았다
유명세답게 북적이는 손님, 겸상을 해야 하는 테이블, 몇 번의 호출과 눈 맞춤이 무색한 웨이팅
그나마 자리가 난 후에도 주문을 받질 않아 합석했던 나이 드신 노부부가 주문을 독촉했고
감사한 도움으로 겨우 그 한 접시의 소시지를 실물로 영접할 수 있었다
소시지 12p, 사워 포테이토, 생맥주 2잔... 괜찮은 식사가 아니었다면 오늘만은
우리의 마음이 조금 상했을 것이다
한 잔을 다 마시지 않고도 취기가 오르는 귀갓길 웃음이 헤퍼졌고 몸동작이 대담해졌다
현지인들이 지나는 모든 길에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외국인 두 명이 아랑곳하지 않는다
웃음은 전염이 되고 전염된 웃음은 덩치가 커져 되돌아오고
웃음이 웃음을 웃음이 기분을 기분이 행동을 행동이 더 큰 웃음을..
얼른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고 다시 문을 열어 제어가 되지 않는 취기를 잠재우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남아있는 이성의 충고를 따른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모든 게 진정이 된 후에 서둘러 집을 나선 건
맑은 날 카이저부르크에서 해가 지는 순간을 오래 지켜보고 싶어서였다
세 번째 언덕길을 오르는데 이미 고백했듯 역시나 좋은 곳은 또 가도 좋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성벽 한쪽에 빽빽하게 기대어 서 있었다
틈을 찾아 딱 1인의 공간만큼의 돌담을 사수한 후에는 우리도 어렵게 얻은 명당을 지키기 위해
추운 날씨 아랑곳하지 않고 망부석이 되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건 다른 기억과 달리 그날의 분위기와 기분은
지금도 꽤 또렷하다는 것과 사정없이 찍어 남겨 둔 수십 장의 사진이 증명한다
지구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내가 사는 곳에서도 심심찮게 목격되는 특별한 해 질 녘 풍경은
그 다채로운 색감으로 시시각각 찰나를 물들이는 초자연적인 순간은 왜,
언제, 어디에서, 목격되었는지 그 문장에 중요한 물음표를 찍게 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 그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순간의 모든 상황과 이유와 감정이
지는 해가 만들어 내는 풍경 속에 물감이 섞이듯 빠짐없이 섞여 들어
그저 해가 지는 순간과는 완전히 다른 색을 만들어 기억 속에 박제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겠지
하나도 같지 않을 매일의 하루 중의 오늘 하루가 나에게, 우리에게, 좀 더 특별해지는 것은
한낮의 성 카이저부르크 Kaiserburg
올드타운 골목골목 구석구석 샅샅이
창의, 문 출입하는, 문
내리막 길 끝 모퉁이를 돌아 발견한 아름다운 커피, 카페, 달콤한 휴식
담아도 담아도 채워지지 않는 자루가 있다면
맛을 위한 기다림의 미학
다시 카이저부르크, 무엇과도 같지 않은 그날의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