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12월 18일

꼭 29번의 크리스마스 - 18 장크트 길겐

by 윤에이치제이

꼭 18번의 잠, 네 번째 도시에서의 열여덟 번째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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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날이 밝았다 이건 두괄식 전개

너무 신이 나고 흥분하면 사람은 실수가 쉽다

그 순간은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지만 깨닫지 못한 그 순간에 쌓인 원인으로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당연한 결과는 기꺼이 감당해야만 한다

그건 내가 저지른 일이고 내가 수습해야 하는 일이고 모든 게 나의 책임이었다





떠나는 내일을 생각하니 오늘 하루가 귀해서 일찌감치 준비도 식사도 마쳤다

아직도 발을 딛지 못한 곳이 남아있기에 이미 마음이 급했다

날도 좋았다 쨍하게 차가웠지만 햇빛도 쨍하게 빛났다


포스트 버스 정류장이 있는 도로로 올라오니

동절기엔 운영하지 않는다는 리셉션의 안내와 달리 케이블카가 운행 중이다

(아마도 간헐적으로 주말에만 운행하는 것 같다)


호수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책길로 들어섰으므로

쯔벨프호른(산)을 오르는 케이블카 일정을 나중으로 미루고

산책길에 나타난 등산로의 길이 좋고 편해 무심결에 그 길을 계속 오르게 되었다

지도에도 표시된 그 길은 완만했고 2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않고 가볍게 등산코스로 산을 오르는 이들도 많고

겨울이면 스키어들도 이용하는 길이라고 해 안심했다


하지만 산은, 빈약한 그 계절의 정보로 함부로 오르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낭패를 보게 될 것이고 이것이 미리 밝힌 오늘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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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조금 올랐을 뿐인데

오른 길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이 멋졌다

이것이 나의 걸음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오를수록 녹지 않은 눈이 길을 덮고 있는데 그럼에도

조금만 더 오르겠다는 생각을 실행해버린 것이다


경사가 없는 눈길은 흔히 걷는 길 위에 내린 눈 위를 걸을 때처럼

가볍고 쉽고 낭만이 있었고 무엇보다

나의 전진을 멈추게 할 만한, 어떤 경고를 던지는 이가 옆에 없었다

아니다, 경고는 있었다

간간히 아이젠을 장착했거나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나를 지나며

파이팅을 외쳐 힘을 주거나 정상까지 2시간이 걸린다는 정보를 주거나

운동화로 오르는 게 힘들지 않겠냐는 염려를 해 주었다

그 말들을 해 준 사람들에게 괜찮다, 고맙다, 손인사를 하며 계속 길을 오른 건

그때까지는 경사가 미미하거나 45도 정도가 최고 경사여서

오르는 중일 때 이 각도는 어렵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그걸 이겨내면 더 업그레이드된 풍경을 선물 받았으므로

보상이 기뻐 되돌아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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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결국 중간지점까지 올라갔다

am 10시 즈음 출발했는데 시간을 확인하니 am11:48이었다

이쯤에서 멈춰야 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그러지 못한 궁핍한 핑계 하나 대자면

위로 더 가팔라질 경사가 빤히 보이고 눈은 발목이 푹푹 빠질 만큼 쌓여 있는데도

오를 때 문제없었던 경사가 뒤돌아보니 도저히 내려갈 엄두가 안나는 공포로 다가와서였다

이제 내려가는 건 불가능하고 선택지 없이 올라갈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이 결정이 (당시의 나에겐) 생사를 오가는 문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내게 당장 스키가 있었다고 해도 결론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놀이기구도 못 타는 겁 많은 나는 내려가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올라가서는 안되었던 일이 이렇게 결론을 내버린 것이다


이런 와중에 당시의 장면들을 사진으로 담아 남겨둘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생명에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아직 감동을 받을 여유가 있는

한마디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멍청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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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지점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얼마 되지 않는 소지품을 품 안에 모두 넣은 후 옷도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 인적도 소리도 없이 산 중턱에 덩그러니 홀로인 채로

의지할 건 나 밖에 없어 힘을 바짝 주고

점점 가팔라지는 경사의 눈 덮인 산을 신중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순식간에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허리를 펴지도 못했다

누군가의 아이젠을 장착한 등산화가 남긴 발자국에 운동화 앞꿈치를 쿡쿡 박으며

오직 그 흔적에 의지해 위로 위로 올라갔다

한 걸음이 점점 더뎌지고 힘이 빠졌지만 오히려 의지는 강해졌다

허리를 최대한 숙여 낮은 자세를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두 손까지 동원해

네 발 달린 짐승처럼 기어서 올라가야 했지만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입에서는 신을 부르며 기도하는 중얼거림이 시작됐다

이렇게 두려웠던 적도 이렇게 살고 싶은 적도 없다는 기구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그 정도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을 상황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남은 생을 위협당하는 최고 수위의 공포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정신을 잠깐이라도 놓으면 아차 싶은 순간 내 몸을 내가 놓치게 될 것이었고

기도는 어쩌면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눈물이 찔금 나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 그러나

눈물이 차오르면 시야가 흐려져 이 곤란한 상황에 더한 시련을 줄 것 같아

어떻게든 꾹꾹 삼켜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제야 그때의 긴박한 심정을 겨우 이 짧은 글로 써 내려가고 있지만

그때의 절박함을 어떻게 적확한 단어와 정확한 표현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다시 전시되는 사진들은 이미 케이블카가 도착하는 정상에

죽지 않고 살아 후들거리는 마지막 발을 내딛고

감사의 숨을 내쉬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물을 정돈하고

제정신을 차린, 한참 후에야 남길 수 있었던 것들이다


삶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싶은 느낌이 비로소 강렬해졌을 때

시간을 확인하니 pm1:35이 되어 있었다

장작 2시간의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견뎌낸 것이다

(세 번에 걸쳐 적힌 시간은 절박했던 당시와 함께 아주 선명하게 남아 일기에 적어 둔 것이다)


사람 참 우습다 인간은 간사하게도

살았구나 싶으니, 살아있는 지금이 현실이다 싶으니, 조금 전의 시간이 바로 직전의 일임에도

흘러가버린 과거로 치환되며 현재보다 덜 중요해진다

오지는 않고 잘 가버리는 시간은 그런 면에서 불행을 잊는 데 좋은 약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심신을 다 잡고 나니 내 앞의 풍경이 선명해지는 것이다

그럴 정신이 없다가 그럴 정신이 생기니 하고 싶은 일은 또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여 또 사진을 찍고 대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미련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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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목숨을 걸고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는 동안

여러 차례 사람들을 싣고 산 정상을 오간 케이블카는 잠시 멈춰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소통되지 않는 언어로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다행히

내려가 매표소에서 요금을 치르기로 하고 부탁은 성사되었다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안전하게 나를 귀가시켜 줄 케이블카에 올라

얼마나 여러 번 감사와 안도의 마음을 되뇌었는지

돌아가고 있다 곧 낮고 편편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다

성냥갑 같던 집들이 점점 커지고 가까워지자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그 감정이 다가 아니었다


부디, 부끄러움은 모두 나의 몫으로 남기를

신께 목숨을 구걸하기 직전까지 그나마 이성이 또렷했을 때까지 나는

이건 정말 나라 망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스로가 너무 싫고 창피하고 넌덜머리가 났었다

케이블카가 머리 위로 지나갈 때마다 저 케이블카 안에서 사람들이

저 아래 웬 미련한 외국인 하나 비웃다가

나라 들먹이고 인종까지 들먹이는 건 아닐까 망상을 하며 괴로웠었다

그러다가 지금 그게 문제냐 사는 게 문제지 싶은 구간에 이르렀고

그 모두가 지나가고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다시금 몹쓸 심정이 되었다


사실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안면 틀 일 없을 온라인상에서조차 이 이야기를 들먹일 수 없을 만큼

그때의 나 자신이 싫었고 다 숨기고 싶었다

지금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다

일기를 글로 적어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보겠다는 결심이

가감 없이 결국 이 고백조차 하게 만든 것이지만 여전히

얼마의 비난을 각오하고 여전히

반성하는 마음을 가진 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것이 솔직한 심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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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우여곡절의 한나절을 보내고

긴장이 풀리며 가누기 힘들어진 몸을 겨우 겨우 참아내며

터벅터벅 걸어 방으로 돌아왔고

이 여행을 잘 대처하기 위해 돌아오자마자 뜨거운 물로 오래 샤워를 했다

그리고 따뜻한 방 안에서 따뜻하게 옷을 입고 따뜻한 차를 마셨다

이 모든 것을 의무처럼 했다 완벽하게 대처할 수 없는 집 아닌 낯선 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별 탈 없이 몸이 잘 견뎌내기를 바랐다


이불속에 웅크리고 누워 꽤 오래 멍하니 있다 보니

저녁 때도 지나고 오늘의 하루도 재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체력 소모가 커서 허기질 법도 한데 뭘 먹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고

그저 남아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아쉽다는 생각만 들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옷을 두껍게 껴 입고 나섰다

가까이 조그맣게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짧은 산책을 했다 그렇게라도 하니 섭섭한 마음이 좀 나아졌다


나갈 때는 비가 내리더니 방으로 되돌아오자 비는 눈이 된다

아침마다 차를 마시며 내다본 창 밖의, 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짧지만 금세 쌓이고 그친, 눈이 소복한 풍경을 또 바라보다가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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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자책하고 자괴감이 든 하루였다

처음으로 외로웠고 무서웠고 남은 여행의 긴 시간들이 염려됐다

긍정적인 생각을 떠올리고 스스로를 다독이려 노력했다

오늘 하루의 실수 때문에 남은 여행의 이유들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좀 더 신중하고 좀 더 조심하고 스스로를 잘 단속하자고

너무 들떠서 나를 그르치고 나를 미워하게 만들지 말자고

무언가를 위해 떠나온 시간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지 말자고


잊지 말되 매몰되지 말아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날은 다른 형태로 또 닥쳐 올 지도 모른다

일상이 아닌 여행이라고 늘 좋은 날들만 계속되진 않으니까

그러니 오늘 딱 한 번 외쳐보려고 한다


촌스러워도

오늘은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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