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29번의 크리스마스 - 22 할슈타트
꼭 22번의 잠, 여섯 번째 도시에서의 스물두 번째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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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을 느끼며 잠을 자고 일어날 수 있다는 소소한 행복
아침 식사를 기다리며 테라스 창문 커튼을 걷어 창 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낯선 곳에서 가만히 있는 게 다인 게으른 아침이 내 것인 행복
지금까지의 아침 식사와 비교하자면 가장 단출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일반 가정에서의 간단한 아침식사 테이블을 받는다
어제 못다 한 얘기를 하자면 할머니는 예상보다 더 연로하셔서 모든 걸
아주 천천히 하시는데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이시며 (이층에서도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한 명의 게스트를 위해 예쁘게 테이블을 차려주신 게 감사했다
첫 잠과 첫 식사인만큼 할머니는 잠자리나 음식에 대해 어떠냐고 물으셨고
나는 그게 진심이니까 모두 다 정말 좋다는 대답을
아주 간단하고 통상적인 영어 단어를 선택해서 하는데
나도 듣는 것에 비해 말하는 게 서툴지만 할머니 역시 영어를 거의 못하셔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영어 단어로 소통한다
할머니와 가족(함께 살고 계시진 않는 것 같다)이 사용할 주방과 식탁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충분히 편하고 좋은 아침 식사를 마쳤다
서두르지 않고 내 방의 테이블에 앉아 두 번째 여유로운 아침 휴식을 취한다
시간에 쫓기지 않아 나가고 싶은 시간에 나가고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올 수 있는 제멋대로의 일정표 없는 하루 일과
아침과 정오 중 정오에 더 가까운 시간 즈음 집을 나선다
어제보다 더 꽁꽁 얼어있는 모든 것들이 지나쳐지지 않아
가까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멀리 서서 오래 지켜보기도 한다
분명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했건만 (서울의 겨울 한가운데서도 겪었던)
갑자기 영하의 낮은 기온에 노출된 배터리는 셔터를 몇 번 누르지도 않았는데
빨간불을 깜박이며 충전해 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에잇... 그렇다고 돌아갈 것 같은가
오늘은 핸드폰 카메라로 만족하자 걷기와 보기에 집중하자
대번에 그런 대범한 마음이 된다 빡빡한 여행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허둥대던 모습은 없다
도저히 이건 안 찍고는 못 배기겠다 싶을 때 품 속에 따뜻하게 넣어 둔
카메라를 꺼내 풍경을 담는다
눈이 쌓이고 얼기까지 해서 가파른 길들을 한 발 한 발 조심히 걸으면서
다른 길 다른 계단으로 오르면 미묘하게 달라지는 할슈타트의
지금 딱 포착한 시선으로 본 모습을 놓치기가 너무 아까워서다
잠시 방으로 돌아왔다 배터리를 다시 충전하면서 나도 충전 중
할머니가 열쇠로 방을 따고 들어오셔서 (할머니인 줄 몰라서) 놀란 나와
아무도 없을 줄 알았다가 내가 있는 걸 보고 놀란 할머니의
어색한 잠깐의 정적 뒤 명랑함을 동원해 할머니께 쉬러 왔다는 설명을 드렸다
할머니는 쓰레기통 비우는 걸 깜박했다고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연세 있으신 할머니와 잘 소통하고 안심시켜드리기 위해
(낯선 이에 대한 만약의 위험을 가정한다면 나보다는 그분이 약자라서)
이곳에 있는 동안은 내 속의 명랑함을 박박 긁어 끄집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해가 지기 전에 다시 한번 외출을 한다
이번에는 배터리가 꾀를 부리지 않길 바라면서
같은 방향이지만 다른 골목을 탐색하며 찾아가는 것은 흥미롭다
도시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 숱한 골목길들이 이어지고 만나는 것이 나를 즐겁게 한다
집으로부터 중심가가 시작되는 곳까지 나오는 동안의 분위기와
중심가가 시작되는 길부터의 분위기는 좀 다르다
흑백사진 속 하나의 컬러로 독특한 포인트를 준 사진을 보는 듯한 풍경을 지나다가
다른 색들이 번지며 컬러풀해지는 아기자기해 풍경들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호수가와 중앙광장으로 이어지는 길과 교회를 지나 보트에서 내린 곳까지를 제외하면
대체로 완만하거나 가파른 경사와 경사의 길들, 그 위에서 집들이 자아내는 독특한 풍경
할슈타트는 참 요상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불빛이 껴지고 있다 돌아가야 한다
긴 길을 걸어 돌아가야 하기에 뒤돌아보지 않고 주춤거리지 않고
오늘은 오늘 분량의 걸음만큼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