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12월 31일

꼭 29번의 잠 - 3 로마 한해의마지막날+외로움+미리새해인사

by 윤에이치제이

꼭 2번의 잠, 로마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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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곳에 거주(?)하게 됐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란 동네 순찰이다

우리 동네가 어떤지 나에겐 중요하다 동네의 골목 가게 집들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그런데 유적지나 관광지 아닌 아무 곳의 로마도 어찌나 로마스러운지

첫눈에 반한 사람은 나를 아프게 해도 씌워진 콩깍지가 잘 벗겨지지 않는다

첫눈에 반했던 도시의 나쁜 기억은 이미 지워지고 벌써 다시 두근거린다






am7시 - am9시 사이에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데

실내복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나와 (이곳에서의) 첫 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으니

미리 준비 중이던 아저씨가 스크램블 에그와 카푸치노를 해 주셨고

요거트와 (아침용으로 이곳 사람들이 빵 대신 자주 먹는) 비스킷과

버터와 시리얼 같은 건 식탁 위에 놓여 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아저씨는 함께 마주 앉아 (영어로 소통이 되지 않으므로)

모든 날의 소통의 수단이 될 번역기로 그러지 않아도 될 대화를 계속 이어주신다

아주머니는 불편하지 않게 필요한 것만 확인하시는데

아마도 아침식사 담당은 아저씨라서 (앞으로도 쭉) 하루에 두 번 이상은 마주하게 된다

하긴 단기간 묵고 떠나는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라서 아마도 나 또한 좀 더 노력해야겠고

그래도 워낙 편히 대해주시니 아주 어려운 미션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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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 위에 오래된 것 속에 오래된 것

온통 낡고 아름다운 것들로 점철된 도시의 풍경이 애증의 마음을 잊게 하고

여러 날의 첫날인데도 걷는 걸음이 멈춰지지 않는다


여기 이곳은 나무마저 늙고 커다랗다 아름답게도


떼르미니 역으로 돌아간 것은 한 달짜리 교통패스를 사기 위해서고

가벼운 몸으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다

역은 꽤 현대적이어서 오히려 이질감이 드는데 바로 옆에 아무렇지 않게

어우러져 있는 유적지와 지도 없이도 아무 데다 나타나는 오래된 교회들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든다 기분 좋은 어지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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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곳이라 삶에 유용한 곳들이 없지도 않다

역에서 가까운 유명한 젤라또 가게 FASSI 마트 EMME

앞으로 자주 오게 될 곳이라는 것은 일종의 선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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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와 잠시 쉬고 난 뒤

처음으로 로마의 밤 속을 거닐어 본다

도시의 밤은 오히려 무섭지 않다 사람들 속에 섞여 드러나지 않고

겁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도시의 좋은 점이다

그렇지만 멀리 가지는 않는다

로마의 노란 불빛은 밝음보다 어두움에 가깝고 가게의 굳게 닫힌 문은 살갑지 않다

언제든 아무 데나 데려다 줄 마법 같은 교통 패스가 나에게 있지만

밤이면 더욱 활발해지는 서울과는 다른 이 거리를 그저 고요히 걷다가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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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가려면 현관에서 거실과 주방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거실 안쪽 방(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방)에서 나오시며 두 분께서

밤에 외출을 했다가 내일 돌아오니 문을 꼭 잘 잠그고 조심히 있으라고 당부하신다

하루 만에 파악된 흥 많은 아저씨는 연말 모임 생각에 벌써 신이 나셨다

이 대목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을 홀로 방을 지키게 된 나에게는 아주 부러운 장면이었다


현관도 방 문도 잘 잠그고 들어와서 전기 히터를 틀어놓고

(로마의 애매한 겨울 날씨는 오히려 초절전 중앙난방과 보조 히터로 견뎌야 하는 식이어서

추위에 대해 더욱 난감하게 됐다 분명 외출을 하기엔 좋은 겨울 날씨이긴 하지만)

저 멀리, 이곳보다 먼저 새해를 맞게 될 건너편의 시간을 계산하면서

1월 1일 00:00 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자정의 통화 대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 메시지를 남긴다

답장은 빨리 돌아오지 않고 외로움이 깊어지지만 여기 있는 고독한 나는

오로지 내 선택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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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는 것은,


가는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결국 아무 데도 가지 못한 것

떠나는 해의 지는 해가 건네는 인사에 손 흔들어 주지 못한 것


바깥은 불꽃놀이와 함성 소리로 여전히 발랄하게 깨어있지만 그럼에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밤거리를 홀로 나섰다 무사히 돌아올 자신이 없었다

콜로세움이 멀지 않고 아마도 그곳은

지나가고 있는 한 해의 모든 것들을 잘 보내주려는 흥으로 시끌벅적할 것이다

이곳에서의 시간과 공간에 좀 더 익숙함을 채워둘 수 있었다면 용기 낼 수 있었으련만

얼마 동안은 마음속으로 망설임과 아쉬움을 가득 품고 안절부절못하기도 했지만

마음보다 소극적인 몸은 끝내 문을 열고 나아가 작별의 시간에 합류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건 주문을 외우는 것뿐,


난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 보다는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 더 중요하고 소중한 마음을 가지지

아쉬움의 지난날에 매달리지 않고 희망의 앞날을 바라보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

특별한 곳 특별한 시간 속에 있지만 특별한 것을 꼭 쫓을 필요는 없지

안타까운 마음도 후회하는 마음도 이곳에서의 많은 시간 동안 충분히 보상받게 될 거야


그래서 결국은 잠들기 전에 다른 계획으로 이 밤의 용기 없음을 위로했다

내일 일찍 일어나 콜로세움으로 가는 거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해 마지않는 포로로마노로 가는 거다

새로이 시작될 한 해의 첫 시작을 자그마치 그곳에 뜨는 첫날의 첫 해로 시작하는 거다

그래, 그거 아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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