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일 : 예쁘게 말하기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하고 싶은 아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릴 때는 말을 잘하고 싶다기보다 말을 재밌게 하고 싶었다. 재미있는 친구들은 언제나 인기가 많았는데, 나 역시 말을 재미있게 해서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었나 보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조별 과제를 하면 발표를 많이 하게 됐는데, 그때는 조리 있게 말을 전달하는 능력을 기르고 싶었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내 이야기가 귀에 쏙쏙 박히도록 하고 싶었는데, 내 발표 실력이 곧 점수로 귀결된다는 생각 때문에 더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일을 시작하면서는 정말 달변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라고 하면 글을 쓰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만 작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글도 잘 써야 하지만 스피치 능력이 월등해야 하는 직업이 방송 작가다. 방송작가는 구성안이나 대본을 쓰기 전, 전체 회의 시간에 자신의 의견을 확실하게 피력하고 말로 사람들을 구워삶아야 한다. 정말 좋은 아이템인데도 그 아이템을 주장하는 사람이 얼버무리거나 소위 말하는 말발이 약할 경우 매력도가 떨어져서 탈락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연차가 오를수록 달변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래 연차 작가들도 회의에 참여하지만, 회의를 주도하는 건 중간 연차 이상의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1,2,3번이 아무 생각도 없이 멍하게 앉아있는 회의라면 죽은 회의나 다름없다.
그런데 최근 어떤 글을 보고 달변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학교폭력 사태 중, 연예인이 연예인을 폭로하는 케이스가 발발했다. 시작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었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연예인에게 당한 것이 일반인뿐 아니라 모 연예인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어 논란은 증폭됐다. 가해자는 부인했지만 동창들에 의해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연예인은 의미심장한 글을 올려 그것이 사실임을 간접적으로 고백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연예인은 에둘러 말하지 말고 확실한 입장을 발표하라고 이야기했고,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진 연예인은 고민 끝에 자신의 SNS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전문을 읽으면서 연예인 자신이 직접 쓴 글인지, 소속사의 도움을 받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글을 참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든 생각은 달변가보다는 말을 따뜻하게, 예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예쁘게 한 말은 곧 예쁜 글로도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연예인은 일목요연하게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겪었던 아픈 감정을,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의 행동을 최대한 힘을 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부인하던 연예인의 이야기를 반박하기보다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오히려 그에게 입장을 발표하라던 연예인은 그 순간에도 한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듯 이야기했지만, 피해자 입장인 연예인이 입장을 발표하자 결국 그는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말을 예쁘게, 따뜻하게 하는 사람은 아니다. 누군가 힘들어서 위로를 구할 때는 최선을 다해 따뜻한 말을 해주지만 언제나 그런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세게 말하는 편에 속하는데, 일을 하면서 더 강해진 걸 느낀다. 일터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연습을 많이 하다 보니 말투나 화법이 굳어진 걸 느낀다. 물론 연애를 할 때는 애교 섞인 말투가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지만 (타인의 평가를 기반으로 쓴 내용임...) 평소 화법은 강하고, 빠르고, 휘어잡으려 하는 편이다. 말이 워낙 빨라서 오디오가 겹치는 경우도 많고, 남의 말을 끊는 경우도 많은데 한두 번 지적을 받은 이후로는 최대한 천천히 말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오늘도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내 말투가 얼마나 강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모두 앞에서 다짐했다. 이제부터 나는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달변가는 포기했고, 따뜻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 분위기를 바꾸어보겠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내 다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오늘 하루라도 제발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3월은 이제 끝나가니 4월 프로젝트로 '예쁘게 말하기 운동'을 시작해보겠다. 부디 얼마 남지 않은 작심 일기에서도 달라질 수 있길 스스로 기대해본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