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기준이 절대적 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인생의 풍파를 겪다 보니 이 나이에 꼰대가 되지 않는 것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꼰대일 확률이 높아서 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권위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어른을 일컫는 말인 '꼰대'를 무조건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중에는 분명 젊은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아 마땅한 부조리한 꼰대도 있고, 자기 말만 다 맞다는 답답한 꼰대도 있다. 사회 안에 숨어있는 수많은 꼰대들을 만나봤지만, 내가 만난 최악의 꼰대는 나의 맞선남이었다.
미팅과 소개팅은 꽤 해봤지만, 맞선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서른여덟의 나이에. 나의 맞선 상대는 아빠의 친구의 조카였다. 아빠의 친구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나이는 4살 위고,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아주 착한 녀석인데 아직 장가를 못 갔네."
소개팅을 해본 사람들은 이 문장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최소한 그의 외모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 어릴 때부터 외모는 크게 관심이 없던 터라 '보통'만 해주길, 아니 '비호'의 수준만 아니길 바랐다.
그는 차로 20분 거리에 살고 있었고, 맞선 당일 우리 집 근처에서 나를 픽업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곳 주변의 맛집으로 나를 안내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까지!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는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까지 동물로 해놓은 그의 외모가 걱정되었다. 외모가 중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제쳐둘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니까. 그렇게 맞선 당일이 도래했다.
낯선 사람에게 집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집 근처의 큰 건물을 알려주었고, 그는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해 있었다. 그가 알려준 차 번호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차 문을 열고 인사를 하면서 약 3초간 그를 바라봤다. 그도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 소개팅을 할 때면 즐겨 입는 검은색 원피스를 팔랑거리며 조수석에 앉은 나는 그때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정면만 바라봤다. 아주 솔직하게 그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정확하게 달랐다. 하지만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사람의 됨됨이를 살펴보자는 생각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아빠 친구분의 표현대로라면 '아주 착한 녀석'이어야 했지만, 그는 '아주'도 아니고 '착한'도 아니고 그냥 '녀석'이었다.
나보다 4살 위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엄청난 무기를 장착한 것처럼 보였다. 초반에는 긴장한 듯 땀을 흘리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어 했다. 본인이 경험한 일들이 마치 정답인 양 나에게 주입식 교육을 시작했고, 38년을 살아온 나에게 이런 스승을 만날 수 있게 해 준 아빠가 보고 싶어졌다.
"혹시 새로 나온 OO 치킨 드셔 보셨어요? 저 엊그제 먹어봤는데 진짜 진짜 맛있어요!"
"아~ 그 유튜버가 먹는 거 봤는데 맛없다고 하던데!?"
"진짜요? 되게 맛있던데~ 제 친구들도 같이 먹으면서 다..."
"아니 아니~ 그게 옥수수 시즈닝은 맛있는데 바삭함도 없고 맛이 없대요. 완전 별로!"
'이봐요! 내가 맛있다고요! 내가 맛있게 먹었다잖아요!'
경험을 전수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맹신하는 유튜버의 말이 정답이라는 듯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주입하는 그의 입을 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솔직하지 못한 표정은 그의 말을 경청하는 어린아이처럼 고분고분했을 것이다. 맞선 자리만 아니었다면 있는 그대로의 성질머리를 모두 보여주고 도망쳤을 텐데. 여러 사람의 관계가 얽혀있는 자리다 보니 나의 행동은 그 어느 때보다 절제되었다.
나는 고민이 생겼을 때, 40대 이상의 어른들에게 답을 구하는 편이다. 20대에게는 꼰대라 불리는 그 부류의 사람들이 나에게는 든든한 조력자이기에 꼰대의 말이 듣기 싫다기보다 귀담아들어야 하는 이야기로 들릴 때가 많다. 그러나 맞선남을 마주하고 나는 꼰대의 기준을 재정립했다. (단순히 나이가 많아 꼰대로 불리는 세대를 제외하고) 젊은 층이 은어로 사용하는 꼰대는,
'자신의 경험이 모두 정답이라는 듯,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내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어른은 꼰대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꼰대인가, 아닌가. 아마 누군가에게는 나 역시 꼰대로 인식되었을 수 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이렇게 해봤는데, 그렇게 하면 안 돼.'와 같은 말을 안 했을 리 없다. 하지만 하늘이 도운 덕에 맞선남을 만나고 나는 거울 치료를 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은인이다.
그래서 그와 나는 어떻게 되었냐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위와 같은 에피소드가 가득 쌓여갈 즈음, 그는 나에게 한겨울에 야외 산책을 제안했다. 나는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서 걸었다. 10분쯤 걸었을까? 이렇게 계속 걷다가는 얼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단호한 어조로 집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바들바들 떠는 나를 위해 따뜻하게 히터를 틀어줬고, 이렇게 헤어지는 건 아쉽다며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영화관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처럼 어둡고 좁은 공간을 답답해해서 평소에도 영화관은 절대 안 간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차에서 내려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꼰대는 되지 말자'라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나의 거절 의사를 이해하지 못한 그는 밤낮으로 전화를 걸어왔고, 끝내 참지 못한 나의 손가락은 장문의 메시지를 남겨 다시는 그가 연락하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그는 누군가에게는 '아주 착한 녀석'이지만, 나에게는 '부정적 꼰대 성향을 지닌 녀석'일뿐이었다. 그가 이 글을 볼 일은 없겠지만 아주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지금이라도 깨닫길 바란다. 당신의 화법이 잘못되었음을,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곱게 늙은 사람들까지 '꼰대'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웬만하면 한 겨울에는 산책은 제안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