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묻는다. '수지씨, 많이 춥죠. 제 겉옷이라도 걸칠래요?'
누군가 답한다. '괜찮아요. 별로 안 추워요.'
괜찮다는 말은 긍정의 의미를 내포함과 동시에 거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시종일관 거절의 용도로 사용하는 걸까. 진정한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고 싶다면 '아니요' '싫어요' '됐어요'와 같은 부정의 의미가 내포된 말을 사용하는 게 나을 텐데. 그러나 우리는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은 사회생활의 일환으로 '완곡한 거절'의 표현을 배워왔다.
"괜찮습니다."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어른에게는 은밀한 미션이 주어진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언행을 조심할 것.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보다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말의 힘으로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악의 없이 내뱉은 한 마디로 누군가는 평생의 상처를 입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다. 그럼 마주하는 상대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사를 준비해야 할까?
사람들은 16가지 성격 유형을 나타내는 MBTI로 타인의 성격과 취향을 판단한다. 지인 중 한 사람은 남자 친구의 성격 중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 MBTI를 알게 되면서 몇 년간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납득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MBTI가 이상한 잣대로 활용되는 것이 내심 못마땅했는데, 이런 순기능이 있을 줄이야. 그렇다면 상대의 MBTI를 파악하는 것이 해결책인가. 하지만 첫 만남, 첫인사로 "반갑습니다. 당신의 MBTI는 무엇입니까?"라는 문장을 사용할 수도 없고, 설사 그 문장을 사용한다 한들 MBTI로 얼마나 정확한 성향 파악이 가능하단 말인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환경에 따라 바뀌는 것이 성향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타인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텔레파시라도 사용하는지 입을 꾹 닫은 채 타인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혹자는 속마음을 들추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한다.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나간 X들을 떠올려보자. 지금까지 만났던 X들과 싸운 뒤 그들이 취한 행동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어떤 X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감정을 모두 털어놓는가 하면, 또 다른 X는 며칠 동안 잠수를 탄 채 스스로 감정을 정리한 뒤 나타난다. 다소 난해하지만 나와 연락을 하지 않는 와중에 SNS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밝히는 X도 있었다. 나는 싸운 당일을 기준으로 하루를 넘기지 않고 함께 감정을 논하고 화해하는 것을 지향하는 편이기에 연애를 하다가 복장일 터질 뻔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토록 다양한 타인의 생각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보편적인 기준을 세우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보편적 기준이란, 결국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더 자세하게 풀이하면 '타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감정을 절제하고 적당히 눈치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내면에서는 싫다고 소리치지만 겉으로는 '괜찮다'라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처럼.
사회생활을 하면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감정 숨기기'였다. 감정은 표정, 말투, 제스처, 언어로 표현된다. 그 네 가지를 모두 감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의 경우에는 네 가지를 모두 감추지 못해 곤혹스러운 적이 많다. 그나마 언어는 감추려는 노력이라도 할 수 있다. 속마음과는 다른 표현으로 진심을 우회하는 것이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나의 의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입모양은 웃고 있는데 눈을 부릅뜨고 째려본다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찌푸린다. 이렇게 표정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말이라도 예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속은 썩어 문드러질지언정, 말은 예쁘게 하기!
하지만 최대한의 배려와 예의를 갖춰 상식적으로 대했음에도 비상식적인 언행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한두 번은 참지만 비상식적인 언행이 지속될 경우, 나의 반격은 진심을 담아 부정의 언어를 최대한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수지씨, 많이 춥죠. 제 겉옷이라도 걸칠래요?'
'괜찮아요. 별로 안 추워요.'
'에이~ 덜덜 떨면서 왜 센 척을 하실까~ 얼른 입어요.'
'아뇨~ 진짜 진짜 괜찮아요! 오늘 날씨 별로 안 추운데...'
'내민 손이 부끄럽게 왜 이러세요. 호의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데~'
'저도 겉옷 있어요. 그 옷 필요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내가 겼었던 상황 속의 대화를 옮겨 적은 것이다. 몇 번이나 거절의 의사를 정중하게 표현했음에도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들이대는 경우에는 곱게 말이 나갈 리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싫다는 말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할 수 있지만 사회에서 마주하는 수백 가지 유형의 사람을 만나다 보면 생각보다 타인의 감정이나 시선을 배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들의 특징은 마치 벽에다 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 통하지 않고, 대화를 하면 할수록 늪에 빠지는 기분이 든다.
사회 속에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른들은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고, 상대의 눈치를 보며, 그가 건네 오는 제안에는 긍정적 반응과 우회적 거절이 담긴 어른의 언어를 사용한다. 보통의 어른이라면 우회적 거절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안하무인격 인간이라도 대화의 맥락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언어 속에 담긴 최소한의 배려쯤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의 차갑고 날카로운 언어 때문에 누군가의 가슴에는 생채기가 생긴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나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하지만 우리는 모두 어른이기 때문에 나의 언행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소소한 대화의 기술만 보더라도 어른이라는 존재는 참 복잡하고 불편하다. 싫으면 싫다고 대답하면 될 것을 우회의 우회를 거듭하여 말한다. 마치 직설적 표현을 하는 것이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우리는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그저 '괜찮다'라고 둘러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