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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Dec 31. 2019

사랑하는 것과 신념을 지키는 것

2019년 여름. 임수정, 전혜진, 이다희, 세 여자의 사이다같이 시원한 드라마가 무더운 여름을 나게 해줬다. 몇 해 전부터 여자들의 파워를 느끼게 하는 드라마들이 속속 등장했지만, 검블유(줄여서 이렇게 부르더라) 만큼 '완벽'하진 않았다. 이 드라마는 등장인물의 설정, 관계, 사건 등 모든 것이 여자를 중심으로 헤쳐모여! 했더랬다. 그래서 더 와닿았고, 한편으로는 현실성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속이 시원했다(그리고 정말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임수정(배타미)의 캐릭터는 능력 있고, 똑똑하고, 용감하고, 자기 세계관이 그 누구보다 확실한 여자였다. 본부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바로'로 이적하면서 TF 팀 팀장 타이틀을 가지게 됨) 30대 후반의 커리어 우먼. 회사에서는 위아래를 막론하고 할 말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사실 일을 할 때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아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화끈하고 똑 부러지는 그녀에게 28세의 물불 안 가리는 연하남 박모건이 등장한다. 배타미는 강산이 변하는 시간만큼의 나이 차 때문에 그와의 관계에서 진지해지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박모건의 열렬한 구애에 두 손 두 발 들게 된다.


배타미 만큼이나 매력 있는 이다희(차현)의 캐릭터는 말 그대로 '화'가 많은 여자. 막장 드라마를 보다가도 얼굴에 붙어있던 팩을 집어던지고, 치한을 보면 앞뒤 생각 다 자르고 일단 들이 박고 보는 성격의 소유자.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막장 드라마 속에서 자신을 열받게 했던 신인 배우를 우연히 만나게 된 차현은 어울리지 않는(?) 덕질을 시작하게 된다. 설지환씨, 라고 부르는 차현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맴도는 듯하다. 휴대폰 벨 소리로 가득한 유실물 보관소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키스신은 굉장히 인상 깊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니콘의 대표이사이자, 배타미의 직속 선배, 차현의 그녀(?)였던 전혜진(송가경). 탄탄대로 코스를 정석으로 밟고 올라온 그녀에게 족쇄와도 같았던 시댁 스토리는 답답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아마 이 드라마 팬들 중 송가경 X 차현의 관계를 설레면서 보는 이들이 꽤 있었을 듯싶다. 작가님은 어쩜 이렇게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토록 매력적인 설정을 부여하셨을까.


이 드라마를 정말 많이 아껴가며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단 한 포인트에서 나는 불편함을 느껴야 했고, 애써 외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다.





나에게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배타미 X 박모건의 '사랑'에 대한 해석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10살 차이라는 나이보다 더 큰 장애물이 지켜 서 있었다. 바로 결혼에 대한 입장 차이. 배타미는 비혼 주의자였고, 박모건은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다 보면 결혼이라는 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박모건은 어릴 적 양부모에게 입양이 되었고, 추측하건대 과거의 경험이 그에게 화목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꿈꾸도록 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부딪히고, 이별을 하고,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참 많이도 쏟아냈다. 



배타미 : 결국 네 인생에 결혼이 없어지거나, 내 인생에 결혼이 생기거나. 사랑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계획이 무너지겠지. 누가 무너지나 보자 하면서 시작하는 게 맞아? 둘 중 아무도 포기 안 하면 그냥 헤어져야 되고. 헤어짐을 향해 달려가는 연애, 자신 있어?
배타미 : 난 벌써 우리의 끝이 내다보이는데 굳이 그 길을 가려니까 발이 안 떨어져. 알잖아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가 안돼, 난. 우린 아주 다른 사람들이야. 박모건, 결혼을 꿈꾸는 너한테 지금은 아주 중요한 시간이야. 그 중요한 시간을 아무꿈도 못 꾸게 하는 사람과 낭비하지 마. 이건 널 좋아하는 내가 아니라, 좀 더 살아본 내가 해주는 얘기.
박모건 : 같이 사는 건 괜찮고, 결혼은 안되는 거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어요.
배타미 : 같이 사는데 결혼이 필요한 건 이해가 잘 되고? 그건 왜 이해되는데? 우리가 함께 산다면 그건 사랑 때문이고 난 그 사랑을 법과 제도로 묶고 싶지 않아. 개인 감정의 일에 국가가 관여하는 게 싫고 그게 내 가치관이야. 



두 사람의 대화에 오류는 없다. 각자의 가치관일 뿐이고, 요즘 시대에 비혼 주의라는 가치관을 가진 이가 손가락질 받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 때문에. 하지만 드라마는 말 그대로 남의 일이기에 '그래, 저건 서로 이해해 줘야지'라고 받아들이지만, 현실에서 내 앞에 닥친 문제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내 옆을 지나쳐간 수많은 남자들 중, 내가 정말 마음을 주고 사랑했던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중 '나 이 사람이랑 평생 같이 살면 좋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혼자, 멋대로 결혼하는 상상을 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가 남몰래 결혼을 꿈꾼 자들은 '비혼 주의자'였다. 정확히 2명. 풀네임을 쓸 수 없으니 (심지어 한 명의 이름은 헷갈리기까지 하다, 정말 사랑했던 게 맞나 싶을 정도) 이 씨와 김 씨라고 명하겠다. 


이 씨의 변은 그러했다. 30대 초반이었던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재정적인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앞으로 몇 십 년을 더 일한다 한들 나아질 것 같지 않다고 했다. 특히 집에 대한 문제가 심각했다. 그의 집에 몇 번 놀러 갔었는데 그는 자신의 집을 공개하는 것조차 창피해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씨, 나는 너를 보러 온 거지, 너희 집 매물을 보러 온 부동산 업자가 아니니 긴장하지 마!'라며 농담을 하곤 했다. 덧붙여 "나 생각보다 돈 잘 벌어! 나만 믿고 따라와!"라는 헛소리를 하며 분위기를 띄우려는 광대짓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낮아져 있는 자존감은 좀처럼 회복될 줄 몰랐다. 거리에서 뛰어노는 아이를 보며 "결혼해서 이 씨 닮은 귀여운 아이 낳으면 정말 행복하겠다, 그치?"라고 쓱 찔러보아도 이 씨는 "난 아이 별로 안 좋아해."라며 시선을 외면했다. 헤어짐을 결심했던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자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와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는 것에 대한 이 씨의 두려움은 그의 언행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고 어느 순간 내 자존감마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김 씨의 변은 아주 당당했다. 나는 내 삶이 중요해! 내 시간이 중요해! 내 시간을 누군가 방해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어! 이 씨의 자존감이 지하 100층이었다면, 김 씨는 L 타워 옥상급이었다. 그는 연애를 할 때도 자기 시간을 확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퇴근 후 갑자기 보고 싶어서 잠깐 얼굴을 보자고 하면, 책을 읽는다거나, 빨래를 한다거나, 운동을 한다는 등 다양한 이유를 들며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한 번쯤은 칭얼대면 나올까 싶어서 "보고 싶다는데 잠깐 나와주면 안돼?"라고 하자, 김 씨는 단호하게 "내 시간을 존중해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결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으며, 내 삶이 타인에 의해 무너지고 방해받는 것이 끔찍하다고 했다. 그의 가치관을 뜯어고치기에는 무리라 여겨 보통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속으로는 잘났다 이 자식아!라고 욕했던 건 사실), 술을 한잔 걸치면 왜 우리는 사랑하는데 남들처럼 결혼을 하면 안 되는 거냐고 울부짖었다. 박모건처럼 또는 배타미처럼 이성적인 대화는 무리였다. 난 울부짖었다, 배고픈 짐승처럼.


배타미와 박모건이 결혼의 가치관을 두고 날 선 대화를 나눌 때면 나는 이 씨와 김 씨가 생각났다. 두 사람의 이유는 극명히 달랐지만,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던 건 같다. 그들을 만날 때 나는 끝이 있는 연애를 했다. 물론 모든 관계에는 끝이 있지만, 비혼 주의로 인해 '확정적 이별'을 선언 받은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의미 없는 외침이지만, 한 사람의 마음만 어찌어찌 돌려세웠다면 우리는 이별하지 않았을 텐데).


배타미가 그런 말을 했다. 


네 말대로 모든 만남에는 끝이 있고 어떤 식의 이별이든 우린 이별을 향해 달려가겠지. 근데, 이별로 달려가는 그 길 위에서 이 초조함을 함께해줄 유일한 사람이 너야. 그러니까 같이 초조하고 같이 불안하자. 같이 위로하고 같이 안심하자. 결국 잃게 되더라도 지금은 가지자, 서로를.


그래, 나 역시 그랬다. 어차피 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 같으니 지금 서로를 사랑하자고. 내일은 헤어질 수도 있지만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자고. 하지만 모든 일에 '계획'을 세우는 나라는 사람에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연애는 시간이 지날수록 괴롭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사랑했지만, 이별을 선택했다. 물론 배타미를 비롯한 수많은 비혼 주의자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들과 나는 서로의 가치관을 변화시킬 생각이 없기에, 평행선과 같은 연애를 하는 게 시간 낭비라고 여겼을 뿐이다. 그 어떤 가치관의 대립보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은 평생을 좌우하는 것이기에 꺾지도 말고, 설득하지도 말고, 서로를 존중해주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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