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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Oct 29. 2020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요즘 지방 출장이 잦다. 덕분에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씻고 잠드는 단순 패턴이 생활화되었다. 그런 와중에 박보검, 박소담이 나오는 드라마 <청춘기록>은 꾸준히 챙겨 봤다. 본방사수까지는 무리고 다음 날 아점을 먹으면서 챙겨보는 정도. 엄청난 서사가 있는 것도, 극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드라마도 아니지만 이리저리 치이는 스펙터클한 드라마만 보아오다가 한 템포 쉬어가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이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들은 대사 톤이 너무 쿨하고 간결해서 리얼하지 않다고 했다. 난 오히려 그런 대사가 인물의 캐릭터를 잘 살렸다고 생각한다. 특히 여주로 나온 박소담의 경우 사람이나 사랑에 기대지 않는 성격으로 그려졌는데, 박보검과 연인이 된 후 그들이 주고받는 문자만 봐도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기보다 아주 냉정하고 똑 부러지는 느낌이 강해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회에서 박소담의 이별 통보에 화가 난 박보검이 앞으로 잘하겠다며 헤어지지 말자고 매달리는 순간에도 그녀의 대사는 담담했지만 강렬하게 다가왔다.



기대는 삶에 대해서 엄청 부정적이야. 엄마가 떠오르거든. 좀 더 시간이 필요해. 예측 불가능한 사람 싫어하는데 내가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거 알았어. 불안하게 하는 사람 싫어하는데 내가 불안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거 알게 됐어. 약속 지키는 거 좋아하는데 약속 지킬 수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거 알게 됐어. 안정 좋아하는데 불안정한 것도 좋아졌어. 널 사랑하면서 난 계속 변하고 복잡해졌어. 그리고 이런 내가 좋아. 






나는 모든 일이 예측 가능하길 원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을 할 때나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러운 상황과 마주했을 때 당황하는 내 모습을 극도로 싫어한다. 회의가 있으면 완벽하게 페이퍼로 정리하는 걸 좋아하고, 짜인 구성이 흐트러지는 걸 싫어하고, 약속된 시간을 넘기는 걸 싫어한다. 자랑할 거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내 기억으로는) 지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건 약속된 시간이고 어기면 안 되는 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작가 친구들은 방송작가에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라며, 어쩌면 공무원이 어울렸을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예측 불가능한 상황 중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순간은 연인 사이에서의 약속 시간이다. 작가 일을 하면서 언제 회의를 하게 될지, 언제 퇴근을 하게 될지, 확실한 스케줄을 알 수 없기에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때에도 '일단 내 상황은 제외하고 먼저 약속 잡아. 최대한 맞춰 갈게.'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연차가 오를수록 일반인 친구들은 점점 멀어지고, 주변에는 같은 처지의 작가들만 남게 된다.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데이트를 한다고 치면 주 중에 한번, 주말에 한 번을 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데, 방송 일을 하는 남자가 아니고서야 작가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박소담의 대사처럼,


나는 예측 가능한 걸 좋아하는데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 버렸고,

안정적인 걸 좋아하고 불안한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 나로 인해 누군가에게 불안함을 주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로 인해 내가 싫어하는 감정을 온전히 받아내야 하는 건 어떠한 선택에 따르는 기회비용과 같은 것일까? 박소담은 박보검을 만나 사랑하면서 자꾸만 변하고 복잡해지는 자신이 좋다고 했는데, 그저 감사한 마음만 드는 게 아닌 걸 보면 나는 이 일을 하면서 변해버린 자신이 무작정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다.


예측 불가능해져 버린 내가 연인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바쁜 와중에도 답장을 늦추지 않는 것.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멀리서나마 문자 혹은 전화로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제스처를 최대한으로 취해본다. 가끔 이 노력이 과해져 잠시라도 연락이 끊기면 안절부절 모드가 발동하기도 하지만, 나의 이 작은 노력으로 불안정한 연애의 흔들림이 최소화될 수 있다면 어떤 노력도 마다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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