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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Apr 22. 2020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시작은 의외로 충동적이었다. 모든 일을 계획적으로 하던 나에게 충동적인 결정이라니, 가족을 비롯한 친한 친구들은 꽤 놀란 눈치였다. 정작 그런 결정을 해버린 나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충동적인 결정이 시작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 구성작가 아카데미 지원했어."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고, 두려움이 많은 학생이었고, 생각이 많은 어른이다. 사소한 결정을 함에 있어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버릇은 나이상으로 완전한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학 시절 사회복지와 경영학을 공부했고,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4년간 전공과 관련된 학회 활동, 자원봉사, 다양한 공모전에 지원하며, 재단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좋은 기회로 타 대학교 내 재단에서 인턴으로 일한 지 반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고, 좋은 선배들에게 많은 걸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첫 출발이 이토록 순탄해도 되는 거냐며 매일 감사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내 마음이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건 안정과 행복을 누리던 그때였다.


책 읽는 시간이 소중해서 중앙도서관을 거의 매일 들렸고, 글을 쓰는 게 좋아서 스무 살 때부터 다이어리를 꼬박꼬박 채워갔고, TV 보는 걸 좋아해서 리모컨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만약 한 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충동적으로 내 발목을 잡았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할 수도 있어.'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직업은 또 무엇인지를 찾아보니 방송 구성작가라는 타이틀이 내 앞에 놓였다. 흔히들 방송작가라고 부르지만, 정확하게는 구성작가라는 타이틀이 맞다. 구성작가로 방송국에 입성하는 일은 간단하면서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특히 겁이 많은 나에게는 더더욱. 가장 간단하면서도 대다수가 선택하는 방법은 방송 아카데미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것이었다. 원래의 나라면 이리저리 재느라 다음에, 시간 되면, 더 알아보고 하자!라고 했겠지만, 그때의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과 맞먹는 아카데미 수강료를 지불하기 위해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과감하게 털어 넣었다. 엄마에게는 약간의 지원금을 요청했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고백을 했지만, 아빠에게는 계속 출근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다행히 아카데미 수업이 오전부터 있었기에 특별한 액션을 취할 필요는 없었다.


아카데미 교육과정을 이수한 뒤, 처음으로 방송 프로그램의 구성작가가 되었던 날이 아직도 생각난다. 앞으로 펼쳐질 길 위에서 첫걸음을 떼던 그날. 두려웠지만, 설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었고, 그로 인해 포기한 안정적인 직장, 차곡차곡 쌓아가던 적금 통장, 퇴근 후 여유로웠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겁쟁이가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질문을 던져보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나 그때... 잠깐 미쳤었나 봐, 나도 모르겠어.'




방송국에서 15년째 일을 하면서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이 길을 선택한 걸 후회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나는 그때마다 쉽게 불평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건 나였기 때문에. 지금도 오랜 친구들은 말한다.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 버는 거 진짜 부러워."

"힘들어도 네가 하고 싶었던 일이잖아. 그게 좋은 거지."


하지만 나는 말한다.


"좋아하는 일이지만 모든 순간이 행복한 건 아니었어. 그래도 참 신기한 게 이 일은 고생한 만큼, 힘든 만큼 뿌듯하다. 겁쟁이가 출세했지?"




10년 차가 되었을 때, 중학교 동창에게서 이런 문자를 받았었다.


솔직히 나는... 네가 갑자기 방송작가를 한다고 했을 때, 이렇게 오랜 시간을 버텨낼 줄 몰랐어. 고생 많다 친구야.


이 문자를 받고 나는 한참을 곱씹었다. 꿈보다 해몽 일지 모르지만, 마치 '그동안 정말 잘해왔어. 10년 동안 힘들었던 순간들도 많았을 텐데, 결국 포기하지 않았잖아. 정말 대단해.'라며 지난 시간을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시작은 충동적인 선택에 가까웠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나는 단단해져 갔다. 모든 시작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어떤 선택도, 기회도, 불현듯 다가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 다가오면 머뭇거리기보다는 스스로를 믿고 용기를 갖는 타이밍이 필요하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세상 겁 많던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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