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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Oct 29. 2020

언제나 전투태세

작가들 모임에는 빠지지 않는 진풍경이 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단체방을 만들고, 어디서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지를 고르는 과정에서 핫플이라 일컬어지는 장소 또는 본인이 가봤던 맛집의 링크를 무한대로 공유한다. 마치 회의를 위해 리스트 업을 하는 작가처럼 가볍게 만나 즐기는 모임조차 전투적으로 서치 하는 그대들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짠하면서도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정해진 장소에 모여 주문을 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누군가가 '그래서 2차는 어디 갈 거야?'라는 질문을 던진다. 또 다시 모두의 손놀림은 바빠진다. 1차 메뉴에 어울리는 2차 메뉴를 선정하기 위해, 오늘의 모임 목적에 따라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등 다양한 이유를 동반한 2차 장소 선정은 꽤 신중하면서도 즉흥적으로 결정된다. 마치 다음 일정이 정해지지 않으면 지금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움직이는 작가들. 말 그대로 '대충'이 없는 집단이다.





작가들의 주도면밀함은 의외의 상황에서도 발현된다.

 

어떤 후배는 소개팅을 앞두고 작가 병이 발동되어 장소 리스트 업을 했다는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그 리스트를 받은 남자의 심정이 어땠을까? 나는 후배에게 말했다. 제발, 뭐든 적당히 하자고. 나중에 연인이 되어 데이트를 할 때는 좋을 수 있지만, 굳이 첫 만남부터 너의 필살기를 드러낼 필요가 있겠냐고. 물론 좋게 표현해서 필살기이지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소개팅 에피소드를 하나 더 풀어본다. 소개팅을 하기 전 상대방의 사진을 요청해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왜 주지 않느냐고 물으면 사진 때문에 기대했다가 실망할까 봐, 사진이 주는 이미지로 인상이 좌우될까 봐 등 다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대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긴 어렵지만, 기대가 없으면 실망할 이유도 없을 거라는 마음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소개팅 남을 맞이하려 할 때쯤! 후배가 상대의 이름과 번호를 물어왔다.


"언니 구글링 한번 해볼게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미 G사의 검색 페이지는 넘어갔고,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후배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 분인 것 같아요'라는 말을 남길뿐이었다. 물론 직업군이 특이해서 찾은 케이스겠지만, *일반인 프로그램을 하면서 갈고닦은 실력을 내 소개팅 상대를 찾는 데 사용하다니 미칠 노릇이다. (*일반인이 방송에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하는 작가들은 전국에 있는 일반인을 찾기 위해 엄청난 스킬과 집요함으로 서치를 해야 한다. 물론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건 아니다. 그저 집요하게 파낼 뿐이다.)






나도 작가지만 가끔은 혀를 내두를 때가 있다. 그럼에도 작가들이 참 대견하고, 대단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하라는 거 다 해주면 안 돼. 안 되는 건 포기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작가들이 그걸 다 해내니까 더한 일을 시키는 거야."


간혹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주어질 때가 있는데 그걸 해내는 경우가 많기에 작가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저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만큼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어주길 기대하는 PD들 때문에 작가들은 점점 집요해진다. 그리고 어떻게든 방안을 마련해서 대책을 세우는 작가들 덕분에 방송은 별 탈 없이 만들어진다.


방송가에서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작가 없이는 방송 못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한 끄덕임이 오갔던 기억이 난다. 집요한 것도 좋고,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다. 다만, 연애할 때만이라도 우리의 전투태세가 조금 무뎌질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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