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만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보지 않는 1인으로서 (시간이 너무 없어서 이슈가 되어 짤로 올라오는 영상을 챙겨보는 편) 어쩌다 하루 종일 TV를 보게 되는 날이면 별것도 아닌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언제부터인지 예능 프로그램은 자막에 의해 재미가 좌우되기 시작했는데, 독특한 말투나 신선한 표기 방식으로 재미를 더하는 것이 날로 발전해 이제는 자막만 써주는 전문 작가가 생기기에 이르렀다. 현재 하고 있는 프로그램도 자막을 써주는 아르바이트 작가가 따로 있다. 그 작가에게는 편집 영상과 함께 현장에서 관찰한 사람만 알 수 있는 출연자들의 캐릭터 분석 페이퍼와 정보 자막에 꼭 들어가야 하는 내용을 정리해서 넘겨준다. 최소한의 정보가 넘어가면 그 외에 감성 자막, 상황 자막, 말 자막 등은 자막 작가의 능력에서 피어나게 된다.
대중에게 전달되는 자막의 힘은 90%가 재미 요소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영상 속 자막을 볼 때 예의주시하는 부분은 맞춤법이다. 오타가 있는지 체크하고, 국어사전에 등록된 어휘를 확인하고, 띄어쓰기를 정리하는 등 맞춤법과 관련된 최종 검수를 해야 한다. 수많은 이가 달려들어 검수를 하는데도 오타가 버젓이 전파를 타고 방송될 때면 기이한 현상에 모두들 혀를 내두른다. 맞춤법 공포증에 걸린 작가들은 눈에 거슬리는 맞춤법 때문에 웃자고 만들어진 예능 프로그램을 마음 놓고 즐기지 못하는 경우다 허다하다. 재밌는 예능을 재미로 보지 못하고, 마치 *종편 시사를 하는 기분으로 '저 표현은 틀렸는데?' '맞춤법 어떡하니?' 등 쉬지도 않고 문제점을 골라낸다. (*종편 시사 : PD가 편집한 영상을 같이 보며 편집 방향에 대해 회의를 하는 걸 시사라고 하는데, 여러 번의 시사 중 자막과 CG, 음향 효과까지 들어간 최종 영상을 보는 것을 종편 시사라고 한다.)
프로그램을 볼 때만 작가 병이 도지는 건 아니다.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을 때도 맞춤법 공포증은 빛을 발한다. 팀 단체방에 글을 올릴 때,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연애를 할 때조차 띄어쓰기 하나도 틀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나마 친구와 주고받는 문자는 약간의 상스러운 표현이 오가고 애드리브가 난무하기 때문에 서로가 용인하는 편이지만, 오타가 발생했을 때 1초가 흐르기도 전에 오타를 수정해 다시 올리는 것 역시 작가 병이라 칭할 수 있겠다.
일을 할 때는 맞춤법 공포증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누군가와 썸을 타는 과정에서 이 공포증이 발생하면 불타오르던 감정도 차게 식게 된다. 공기업에 다니던 G군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빠미를 장착했고, 다정하면서도 센스 있는 말투가 호감을 갖게 만들었다. 외모에도 신경을 쓰는 초식남 냄새가 났고, 어찌나 관리를 잘했는지 모공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매끈한 피부를 소유한 남자였다(웬만해선 피부로 지지 않는 편인데,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한테 피부로 져보긴 처음이었다). G군과 썸을 오래 타진 않았지만 썸을 타는 기간 동안 모든 게 완벽했던 그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었던 건, 내가 감기에 걸려 골골대고 있을 때였다.
[몸은 괜찮아?]
- 아파. 어제 너무 얇게 입고 나갔나 봐.
[그러게ㅠㅠ 패션이 중요한 게 아니라구...]
-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
[그래, 오빠가 감기 빨리 낳으라고 기도할게! 어여 자.]
아파서 다 죽어가는 나에게 갑작스럽게 출산을 강요하던 그의 문자 내용. 찝찝했지만 오타겠거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기 전 도착해있던 그의 문자에는 여지없이 감기 출산을 종용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몸은 좀 어때? 감기는 좀 낳은 거 같아?ㅠㅠ]
제발 그만! 아픈 와중에 그에게 감기는 낳는 게 아니라고 지적할 수도 없고, 배울 만큼 배웠다던 그에게 맞춤법 과외를 해주기도 민망한 상황.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영화 보고 싶은 날씨'라는 뜻이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로 나를 도망치게 만들었다.
[오늘 영화권 날씨라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나가. 알았지?]
밝힐 수 없는 G군의 엄청난 잘못으로 우리의 썸은 종료되었지만, 아마 내가 그와 본격 연애를 시작했더라면 코너 속의 코너 느낌으로 일대일 맞춤 강의가 시작됐으리라. 물론 그렇다고 내가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고, 맞춤법 장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나 역시 맞춤법이 헷갈려 초록색 창을 수시로 방문하고, 다양한 사이트의 맞춤법 검사기를 끼고 산다. 혹자는 '대충 넘어가도 되잖아'라고 하지만, 이 역시 직업병이라면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