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고 '라떼 이즈 홀스'에 익숙해지는 꼰대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세월이, 경험이, 연차가 쌓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멀고 먼 기억을 끄집어내어 잔소리인지 푸념인지 모를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이 되었는데, 이게 꼰대의 습성 인지도 모르고 나는 열심히도 떠들어 댔다.
후배들과 재미 삼아 꼰대 테스트를 했던 날, 나는 현실을 자각했다. 무려 꼰대 레벨 4! 심지어 특징이라고 적힌 문구는 '요란스런 처단자'였던가. 웃자고 한 테스트 결과에 나 홀로 웃을 수 없었다. 친한 후배는 결과를 보고 배를 잡으며 킥킥거렸고, 나는 공신력 없는 테스트 덕분에 잠시나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나 진짜 꼰대 됐나 봐.
모든 방송 프로그램이 바쁘고 일이 많지만 유독 힘든 프로그램들이 있다. 역대급으로 힘들다고 생각하며 한 주 한 주를 힘겹게 버티고 있을 때쯤, "언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라며 후배가 일대일 면담을 신청해오면 나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에 두통이 밀려온다. 후배들이 단독 면담을 신청하는 경우의 80%는 그만두겠다는 이야기이므로, 듣기도 전에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나도 그만두고 싶지만, 그래도 레귤러니까, 일하는 사람들은 좋으니까, 페이는 나쁘지 않으니까 등의 이유로 버티고 있는데 '왜 그만두겠다는 걸까?' 강산이 변하고 시대가 변해도 퇴사하는 이의 변은 크게 다르지 않다. 몸이 안 좋아서, 부모님이 아프셔서, 다른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 나도 안다. 너희가 말하는 이유는 핑계고 진짜 이유는 힘들어서라는 걸. 주말도 쉬지 못하고, 매일 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쉴 수 있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힘들어서 그만둔다고 하면 쉽게 놔주지 않을 걸 아니까 다른 말로 포장을 한다는 것도 안다. 이미 몸과 마음이 떠난 사람은 잡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매달리는 편도,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저주를 퍼붓는 쪽도 아니다. 그래 다음에 좋은 기회로 다시 보자,라고 쿨하게 보낸 뒤 친한 선후배들에게 속상하다며 술을 사달라고 조르는 편.
"우리 때는 기획료도 없었잖아. 몇 달을 무보수로 일하면서도 버텼는데. 요즘은 진짜 많이 좋아지지 않았니? 나 때는 말이야... 이러쿵저러쿵... (내가 생각해도 질리는 멘트라 이하 생략)"
이런 얘기를 늘어놓으면 후배들은 말한다.
"언니 꼰대 다 됐네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소리를 해요. 워라밸 보장 안되면 요즘은 일 안 해요. 자기 삶이 있어야 일 능률도 오르는 거고. 사실 그게 당연한 거지!"
나도 안다. 그런데 속상하니까. 내 맘 같지 않으니까 괜히 투정 부려 보는 거야. 실은 나도 그만두고 싶다고! 친구 만날 시간도 없고, 연애할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야근 수당이 나오길 하냐, 보너스가 있길 하냐. 우리 4대 보험도 안 되는 프리랜서잖아. 그런데 나는 왜 바보같이 버티고만 있는 거냐고!
일을 하면서 늘어난 꼰대력은 연애를 할 때도 은근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두해 전 6살 연하와 만났었는데, 나는 사회생활을 10년 넘게 해온 사람이었고, 그는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2년 차 새내기였다. 외모에서는 크게 나이 차이를 느끼지 못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자신 있게 말해본다), 특정 시기의 추억을 공유하거나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공유할 때면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세대 차이 때문에 헛헛한 웃음으로 상황을 마무리한 적이 몇 번 있다. 약간의 민망함이 느껴질 때는 괜한 애교를 부리며 무마했지만, 적잖이 당황한 그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 연애의 끝은 결국 나이 차이로 인한 갈등에서 시작되었는데, 헤어지고 난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내가 그의 자존감을 누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때에 따라 6살 연하의 남자 친구를 2년 차 후배처럼 대했던 건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나의 오지랖이 총출동했던 날의 기억 때문이다.
그날따라 각자의 일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술을 마시게 됐는데, 나는 팀 내 불화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걱정이라며 고민을 읊어댔고, 그는 잘 해내고 싶은데 미숙하기만 한 자신이 답답하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서로의 고민을 접수한 우리는 진심을 담아 위로했다. 하지만 나의 위로는 조언에 가까운 잔소리였다.
"이제 2년밖에 안됐잖아. 너무 부담 갖지 마. 지금처럼만 열심히 하면 어느 순간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하면서 능숙하게 해낼걸?! 그 연차에 맞는 일이 있는 거고, 넌 그걸 해내고 있는 것뿐이야."
그리고 그는 내 고민의 답으로 나를 따뜻하게 안아줬다. 그저 마음 쓰지 말라고, 내가 속상해하는 모습이 마음 아프다며 꼭 안아줬다.
그날 밤 나는 두 발을 뻗고 잠들었을 것이다. 그의 고민을 해결해 줬다고 뿌듯해하며. 어쩌면 그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잘하고 있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을 텐데, 나는 왜 괜한 오지랖을 떨며 선배 모드를 장착했을까. 친한 후배는 직장 상사 모시듯 연애했을 그가 안쓰럽다고 했다. 매번 그랬던 건 아니었다고 소리치면서도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때의 내가 너무 부끄럽고 한심해서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경험 삼아 그 후의 연애에서는 선배인 척, 꼰대처럼 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해주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속으로 꾹 참았다.
어른 말씀 들어 손해 볼 거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어느새 나도 그런 말을 하는 나이가 되었고, 오늘도 후배들에게 알게 모르게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당장 이번 주에 하게 될 촬영에서도 자연스럽게 꼰대력은 발휘될 것이다. 비록 꼰대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순 없겠지만, 문제를 인지하고 변하려 노력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썼다. 아무튼, 꼰대여서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