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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상가 J Oct 19. 2020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올해 초, <보통의 거짓말>이라는 타이틀을 건 전시회에 갔다가 마음에 쏙 드는 문구를 발견했다. 일본 대표 여류작가인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 <달콤한 작은 거짓말>에 실렸던 문장을 옮긴 것 같았다.

        


사람은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
혹은 지키려는 사람에게.



나는 이 문장을 수많은 연인들에게 안겨주고 싶다. 만약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는 연인이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으며, ‘나는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라는 눈빛을 장착한 뒤, 과거의 연애사를 묻는다면 당신은 거짓말을 할 준비를 해야 한다. 아니, 거짓이 아니라 솔직하게 모든 걸 드러내지 않을 준비를 해주길 바란다. 그저 신이 나서 순진무구하게 당신의 과거를 와르르 쏟아내는 순간, 연인의 표정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잃고 흙빛으로 변해가게 될 것이다.


과거에 만났던 H군이 생각난다. H는 거짓말을 극도로 싫어했다. 흔히들 말하는 하얀 거짓말조차도 용서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는 나에게 모든 걸 다 이해할 수 있으니 어떠한 거짓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든 자기에게 걸릴 것이라며 확신하듯 경고했다. 


솔직히 나는 거짓말을 안 할 자신이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들이 늘어갔고, 자랑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스킬 또한 늘었다. 특히 사람이나 장소 섭외를 하는 업무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약간의 허풍과 과장을 늘어놓게 된다.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것이 거짓말을 하는 것과는 결이 다를 수도 있지만, 그 과정 속에는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부분도 있기에 누군가에게는 거짓말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엄포를 놓는 H에게 내가 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겠냐고 큰소리쳤지만, 솔직히 몇 번 하긴 했다. 그리고 그의 경고대로 몇 번은 걸려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아주 귀신같이 거짓말을 솎아내더라).


H는 아주 가끔 과거의 연인에 대해 물었다. 괜찮다고, 네가 어떤 사람과 어떤 연애를 했든 나는 다 이해할 수 있다고. 그 말을 하던 H의 눈빛은 왠지 진실되어 보였다. 이 사람에게만큼은 모든 진실을, 모든 과거를 다 털어놔도 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나의 과거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댄 결과는 참혹했다.


H는 말다툼을 할 때마다 ‘네가 이렇게 말하니까 그 남자가 그렇게 말한 거야.’ ‘넌 왜 항상 그런 식으로 연애를 해. 전남친이랑도 그것 때문에 싸웠잖아.’라는 식으로 나를 몰아세웠다. 마치 내 과거를 인질 삼아 나를 협박하듯 그의 입에서 내 과거 이야기가 단서처럼 적용될 때마다, 영화 <맨 인 블랙>에서 사용되었던 기억을 지우는 플래시로 H의 기억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정말 억울한 건, 그는 자신의 과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좋은 기억이 아니라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등,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대며 본인의 과거를 절대 발설하지 않았다는 것. 지금 생각해도 아주 악질인 녀석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연인을 지키고 싶다면 과거에 대해 너무 솔직해지지 말자. 내 짝꿍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입을 여는 순간 당신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과거가 독기 품은 화살이 되어 심장에 비수처럼 꽂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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