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 가스 라이팅

감정에 대한 책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by 몽상가 J

누구나 가스 라이팅이라는 단어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가스 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와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서 그 사람이 판단력을 잃게 만드는 것인데, 일종의 정신적 학대이며 타인에 대한 통제 능력을 은연중에 행사하는 것이다.


가스 라이팅이라는 단어는 연극과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던 <가스등>이라는 작품에서 유래된 말이다.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남편이 속임수와 거짓말을 통해 아내를 미치게 만드는 내용인데, 남편은 집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해 놓고 아내가 집안이 어두워졌다고 하면 '당신이 잘못 본 것이다', '이상한 말을 한다'라며 아내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고 의심하게 만들어 결국 아내가 남편에게 의지하도록 한다. 이 작품을 기반으로 미국의 정신분석 심리치료사인 로빈 스턴이 가스 라이팅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스 라이팅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건, 드라마 <청춘시대>를 통해서였다. 한승연과 지일주 커플의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면서도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생각돼 소름이 돋았다. 지일주는 한승연의 말과 행동, 감정 표현에 대해 모든 것이 한승연의 잘못이라며 몰고 갔고, 한승연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지일주의 격한 반응에 스스로를 자책하기에 이른다. 전형적인 가스 라이팅 사례! 그리고 지일주가 한승연을 납치해 결박하고, 재갈을 물리고, 폭행을 가하는 씬은 데이트 폭력이라 불리는 현실 문제였다.


사람들은 정말 가깝고 친한 사람에게서 가스 라이팅을 당한다. 가해자는 피해자와 가까운 만큼 상황을 조작하기가 용이하며, 어떤 포인트가 피해자를 힘들게 만드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소한 부분으로도 피해자의 자아가 흔들리게 만들며, 꾸준히 세뇌시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가스 라이팅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족, 친구, 애인 등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이일수록 가스 라이팅은 더욱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난 것처럼 말해도 피해자는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기억을 왜곡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가해자는 피해자를 무시하고, 억누르며 마치 피해자가 잘못된 생각을 하는 문제적 인간인 것처럼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난 절대 가스 라이팅을 당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스 라이팅을 당하는 사람들이 바보여서, 어리석어서 당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심리적 학대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내 기억 속 가스 라이팅은 연애의 끝물에 발견되었다. 정말 많이 좋아했던 사람과의 관계가 평등하다기보다 내가 예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의 나는 '그 사람의 연애 스타일인 그런 건가?' 아니면 '그 사람의 성격이 조금 과격한 걸까?'라는 생각으로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연애가 끝난 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는 아주 강력하게 가스 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나의 과거를 이야기하게 만들어놓고 그 과거의 행동을 인질 삼아 잘못했을 때마다 '너는 그런 사람이야', '너 예전에도 그랬잖아'와 같은 말을 하며 혼을 냈다. 그와의 관계 속에서 있던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나는 어느 순간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문제라도 나는 안되고, 자신은 괜찮다는 식으로 납득시키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나도 화를 냈지만, 그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해서 어느 순간 그게 맞는 건가 싶은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헤어진 후 생각해 보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지금이라도 전화를 걸어 욕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들춰내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 내버려 두었다.


내가 아는 지인은 부모님에게 가스 라이팅을 당했는데,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에 비해 공부를 조금 못했다는 이유로 부모님은 그녀의 멘털을 으스러뜨렸다. 사실 그녀는 남들이 들으면 다 아는, 스카이 다음으로 유명한 대학을 졸업했고, 똑똑하고 성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은 거의 바닥에 붙어있었다. 정말 많이 친해진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부모님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를 받아 사회에 나와서는 오히려 상처받지 않으려 센 척을 했단다. 아마 그녀의 부모님은 자신의 행동이 정신적 학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자식 잘 되라고 쓴소리를 한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릴 적 부모의 한 마디는 한 사람의 인격을 완성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요인인 만큼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쓰려던 글이 또 길어졌다. 누구나 가스 라이팅을 당할 수 있고,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가스 라이팅을 행할 수 있다. 신체적 학대는 겉으로 보이지만, 정신적 학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정말 내가 잘못한 것 같고, 상대의 말이 나를 위한 조언같이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를 의심하거나 자책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누군가 당신을 위하는 척하며 조언을 건넬 때, 그 순간 기분이 나쁘다면 그것도 가스 라이팅이 될 수 있다. 가스 라이팅 가해자는 당신의 약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약점을 이용해 당신의 심리를 흔들어 놓을 것이다. 엄청나게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 누구도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고, 나보다 나를 더 아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자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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