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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거북서점 01화

휴가

by 오프리

휴가휴가

지하철역 출구를 벗어나자 리안의 발걸음은 터벅거렸다. 여덟 평짜리 원룸이 있는 빌라로 향하는 길, 몸은 고된 하루의 무게에 무겁게 짓눌려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묘한 기대감으로 가볍게 들떠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 숨겨둔 보물상자를 열어볼 참인 양, 애틋한 설렘을 안고 동네 마트로 향했다.

마트 계산대를 통과할 때, 리안의 손에는 단단하고 투명한 아크릴 통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곧 세 자매 거북이들의 임시 거처가 될 것이었다. 리안은 아크릴 통을 의식적으로 감싸 쥐었다. 종이와 활자의 질서가 아닌, 맥박 뛰는 생명을 다루는 일.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큐레이터의 고독한 책임과는 결이 달랐다. 이는 작고 연약한 존재의 미세한 떨림에서 오는, 삶과 직결된 근원적인 낯선 긴장이었다.


빌라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리안은 문득 영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낡은 현관문의 듬성듬성 벗겨진 푸른색 페인트가 손톱으로 긁으면 쉽게 바스러질 듯 낡고 건조했다. 그 틈새로 녹슨 쇠의 거무칙칙한 색깔이 엿보였다. 그 앞에서 리안은 잠시 머뭇거렸다.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영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 끝내고 집에 들언고?” *


영숙은 막 밭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에 딸의 전화를 받자, 흙 묻은 장갑을 벗는 것도 잊고 서둘러 수화기를 귀에 댔다. 딸이 서울에서 북큐레이터로 바쁘게 지내는 것을 알기에, 이 저녁 시간의 전화는 반가움과 동시에 은근한 설렘을 품게 했다. 리안은 얼른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감정들을 털어내고, 억지로라도 밝은 기색을 목소리에 섞어내려 애썼다. 이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리안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마치 비밀스러운 거짓말을 얇은 포장지에 싸서 조심스레 건네는 기분이었다.


“어멍, 주말에 집으로 내려갈 거라. 사을 휴가 냈수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라게? 휴가철도 아닌디, 느영 회사서 무슨 일 있언?” ***


영숙은 낯선 반가움이 먼저 목구멍을 타고 올랐으나, 뒤이어 '무슨 일인가' 싶은 싸늘한 예감이 이내 그 기쁨의 물결을 텁텁하게 만들었다. 수화기를 든 영숙의 손에는 미소와 주름이 동시에 잡혔다. 리안은 이 순간만큼은 내면의 불안한 파동을 감추고, 능숙한 '회사원 리안'의 역할을 해내야 했다. 리안은 이 얄팍한 위장막이 영숙의 날카로운 직감을 무사히 피해 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회사이서 나 맡은 일 하맨 속았댄, 특별히 쉴 때 주엇수다." ****


휴가 핑계를 대야만 했던 리안의 입술 끝이 잠시 쓰게 말려 올라갔다. 고향과 현실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 덜컥 내려갈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속사정을 애써 감추고 싶었다.






* "일 마치고 집에 들어왔어?"

** "엄마, 주말에 내려갈 거예요. 사흘 휴가 냈어요."

*** "뭐라고? 휴가철도 아닌데, 너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 "회사에서 내가 맡은 일 하느라 고생했다고, 특별히 쉴 시간을 주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