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껍데기
아기 거북이 세 마리가 리안이 근무하는 대형 서점의 수족관에 처음 들어왔던 때는 숨 막힐 듯 높은 빌딩숲의 틈바구니에서 은행나무 잎들이 지폐처럼 흩날리던 가을 중턱 무렵이었다. 그 작은 생명체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리안은 생경함을 동반한 위안과 낯선 책임감이 동시에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 그 거북이들은 이제 막 서울의 또 다른 낯선 곳으로 이사를 온 참이었다. 리안에게 이 방은 숨 쉬는 공간이자, 고된 하루를 마감하는 묵묵한 요새였다. 잠자고, 먹고, 일하는 모든 행위가 한 공간에서 해결되는 단칸방이었지만, 서울이라는 파도 위에서 리안이 매일 닻을 내리는 작은 항구였다. 이제 소박하지만 단단함이 베여있는 작은 소라게의 집 안에 세 마리의 작은 생명체가 나란히 자리했다. 리안에게는 고독한 안식처였던 이 공간이, 거북이들에게는 경이롭고 낯선 신세계일 터였다.
리안은 현관에 내려놓았던 상자를 풀어헤쳤다. 생활 생채기가 오래도록 덧대어진 옹이 없는 강화마루 위, 상자 안에는 축축이 물기를 머금은 키친타월이 깔렸고, 그 위에 아기 거북이 세 마리가 작은 머리를 숨긴 채 웅크리고 있었다. 리안은 그들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생전 처음 맡는 섬유 유연제 향, 묵은 먼지가 뒤섞인 눅진한 공기, 그리고 아직 마르지 않은 빨래의 축축함이 뒤엉킨 습독의 방 안에서 세 마리의 등딱지는 유난히 작고 연약해 보였다. 리안은 마치 위험한 세상에서 도망쳐 온 작은 난민들을 대하듯, 숨소리조차 조심하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리안은 그들을 새로 사 온 투명 아크릴 통으로 조심스럽게 옮겨 놓았다. 상자에 담겨 움츠러들었던 작은 생명체들이 새로운 바닥에 닿았을 때, 젖은 발이 플라스틱 바닥에 닿으며 작게 '착', '착' 하고 달라붙는 소리가 났다. 미세하고 축축한 소리가 새로운 삶이 정착했다는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거북이들은 더 이상 흔들리는 상자 속에서 몸을 웅크리지 않아도 되었다. 투명하고 단단한 아크릴 통 바닥은, 작은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이제 이 방은 당분간 리안의 침묵의 요새를 넘어, 세 자매의 작은 왕국이 될 참이었다.
리안은 아크릴 통 위에 몸을 숙이고 한참 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 거북이 세 자매가 있던 서점의 그곳은 어떠했던가. 그곳은 3천 리터의 물과 긴 트랙처럼 이어진 고리 모양의 물길, 작은 모래 언덕과 축소된 인공 숲이 어우러진 미니어처 생태계였다. 투명 유리벽은 서점 내부의 생활 소음을 차단했고, 그 고립된 섬 안에는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듯한 고요한 사색만이 머물렀었다. 거북이 세 자매는 그 서점 한복판에서 느림의 위안을 주었지만, 리안이 직면한 차가운 바닥에 놓인 맨얼굴의 현실 앞에서, 그 평온했던 사색의 섬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리안의 눈에, 지금 방바닥에 놓인 투명 아크릴 통은 너무나도 옹색하고 초라했다. 얇고 투명한 플라스틱 벽은 유리벽처럼 사색을 위한 침묵을 지켜주지 못했고, 그들을 주변으로부터 격리하기는커녕 모든 것을 얄팍하게 노출할 뿐이었다. 서점에서는 유리벽이 그들을 외부의 모든 분주함으로부터 격리해 주었지만, 아크릴 통의 좁은 공간은 세 자매의 느린 움직임조차 제대로 담아낼 수 없어 보였다. 리안의 원룸은 고요했고, 은은한 스탠드 불빛만이 통 안을 비추고 있었다. 리안은 이 작고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를 내려다보며, 온전히 자유를 누리던 세상에서 격리된 난민처럼 거북이들을 좁은 방에 가둬둔 것만 같아 가슴 한구석이 애잔했다.
"미안해, 얘들아. 임시 거처라지만, 너무 좁지?"
리안은 낯선 곳으로 그들을 데려온 미안함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거북이들을 가까스로 침묵하던 혼돈의 세상으로부터 구출해 냈다는 안도감이 그 미안함의 가장자리를 잔잔하게 다독였다.
혹시 거북이들은 지금, 마음껏 헤엄치고 숨을 곳이 많았던 그 타원형의 해자를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리안의 시선은 곧 방문과 창문, 그리고 자신이 하루의 대부분을 비워둘 책상 위에 머물렀다. 이제 이 작은 생명체들은 자신이 방에 없는 동안에는 길고 깊은 침묵 속에 홀로 남겨질 것이다. 리안은 문득, 거북이들에게 생전 처음 겪을 낯선 외로움을 덜컥 안겨준 것은 아닌지 하는 묘한 죄책감이 다시 한번 어깨를 짓눌렀다. 리안은 그들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였다.
"괜찮아. 여기는 이제 조용하고 안전해."
그 말은 거북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맹세에 가까웠다.
“벌써 부양할 가족이 생기다니...... 우리 함께 잘 지내보자. 음?”
리안이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검지 끝으로 아크릴 통의 표면을 톡톡 두드렸다. 세 마리 중 제일 작은 거북이가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양, 작고 까만 눈을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그 옅은 응답 앞에서, 리안의 얼굴에 덮여 있던 불안과 피로가 살짝 걷혔다. 곧 희미하지만 온전한 미소가 그 자리를 채웠다.
“좋아. 오늘부터 네가 대표 선수해라. 참, 너희들 이름은 내가 차차 생각해 볼게. 혹시 좋은 이름 생각나면 내게 말해주렴.”
리안은 그 작은 생명체들을 측은한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보며 속삭였다. 이제 막 한 식구가 된 거북이들을 향한 진심 어린 약속이었다. 리안은 거북이들의 세계가 마침내 자신의 급박했던 속도를 멈추고, 자신을 그들의 느리고 고요한 궤도 안으로 끌어들인 기분이 들었다.
샤워를 짧게 마친 리안은 소파로 향했다. 전날 밤 침대 헤드 앞에 뒤집어 놓았던 하늘색 표지의 책을 챙겨 들었다. 책 제목은《거북이 키우는 법》.
페이지를 펼쳤다. 파란 바다를 연상시키는 표지 위에, 고래 모양 책갈피가 그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리안은 책 표지 위로 고개를 숙였다. 리안의 눈빛에는 단 한 페이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남은 분량이 얼마든, 밤이 얼마나 깊어지든 상관없었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스며들었지만, 리안의 시선은 밤의 침묵을 깨고 말없이 속삭이는 종이 위에 머물렀다. 이 작은 책 안에, 리안과 거북이 세 자매의 새로운 삶을 위한 모든 해답이 들어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