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발동!!
"너 어렸을 때 호기심 많았었잖아, 내가 널 모르니, 해보고 싶지?"
어머니는 커뮤니티 카페에서 일하셨다. 몇 년 전 직장에서 연차를 쓴 날이었을 거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을 방문했다. 어머니가 해주신 캐러멜 마키아또가 달콤했던 날이었다. 특이한 기계로 에스프레소 탬핑을 하면서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탬핑 한 번 해볼래?"라고 말이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어릴 적 난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나 보다. 뒤이어 따뜻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엄마직장에 방문한 게 반가웠는지 집에서보다 한 톤 높은, 사랑이 넘치는 음색이었다.
"너 어렸을 때 호기심 많았었잖아, 내가 널 모르니, 해보고 싶지?"
엄마의 기대와 다르게 난 관심 없었다. 엄마가 알던 소녀는 호기심을 잃어버리고 성인여자가 된 것 같다. 겨우 관심 있는 척 7살 정도 되는 동심을 연기하며 탬핑을 올려본다. 언제부터 자주 찾아오는 '부들부들' 수전증 친구와 함께 긴장하며 시도한다
참, 나이 들수록 사람의 시선과 환경에 나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두려움과 긴장감이 쌓이고 쌓여, 내 삶에 괴물로 보이는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다. '까짓 거 연습인데 잘 못해도 되잖아, 왜 손은 쓸데없이 떨어 버리는 걸까?' 싶었다.
호기심이란 순수한 아이를 밀쳐버리는 두려움과 긴장감이란 존재가 있다. 성인이 되고 새로운 경험들을 쌓아갈 때 사람들은 고난을 자주 겪게 된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하고 건강이 악화되면서 하루하루 겨우 버텨내는 악몽의 연속선이 주어질 때도 있다. 삶에 실망하는 일이 누적될수록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 같다. 그대로 비관하고 무관심의 늪에 빠지던가, 아니면 아등바등 호기심을 지켜내며 애정으로 삶을 지키는 거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인격의 열매를 맺는 중요한 과제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인간으로 내려와 십자가에서 돌아가고 부활하신, 그 발자취를 뒤따르는 하나님의 양자녀로 걸어가야 할 방향성이 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호기심은 그 결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랑을 회복하게 하는 힘 같다는 생각도 한다. 바쁘게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다른 생물을 향한 호기심이 없다. 애정의 시작 같은 궁금함이 없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하고 다닐까?', '이 사람은 오늘 머리가 바뀌었구나?'같은 따뜻한 질문이 없다.
어린 시절, 이것저것 경험하지 못했기에 가지게 되는 호기심이 있었다. "지렁이는 말이야, 웅덩이에 숨어있다가 때론 독을 가지고 사람을 공격한대" 유치원친구와 하원길에 들었던 말을 떠올려본다. 괜스레 비 오는 날 지렁이를 발견하면 호기심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진짜 독을 가지고 있나, 그렇다면 어디다 숨겼지?' 동심의 레이더를 발동시켜 물끄러미 관찰했었다. '요 녀석, 자꾸 보니까 귀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꿈틀거리는 모습이 징그러워서 그런 애정은 금방 사라졌지만 관찰할수록 친숙해지는 뭔가가 있었다.
삶의 무게를 더해갈수록 가져야 할 호기심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하는 것 같다. 새로운 것을 어린아이처럼 바라보는 순수함, 자존심 내려놓고 모른다면 모른다고 인정하고 물어보는 태도는 자신을 낮추면서, 호기심의 시야를 넓히며 세상을 더욱 깊숙이 알아가겠지.
알게 되면서 경험하는 호기심도 있다. 예를 들면 타인의 아픔이 나의 아픔에 맞닿아 있을 때 터져 나오는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 더욱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건 두려움의 터널을 지나 가지게 되는 호기심이다. '너도 참 힘들게, 열심히 살았구나'라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만드는 호기심.
어린아이의 호기심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려고 한다. 두려움과 긴장감을 통과해,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성인이 가지는 호기심으로 새로운 열매를 맺어보려고 한다. 그렇게 호기심을 연습하는 것을 다짐했다. 주변에 있는 조그만 것부터 시작이다. 사물이든 비사물이든 말이다. 내 주변의 소소한 것들에 관심을 가질 줄 아는 호기심이 쌓이면 세상을 향한 엄청난 애정이 생길 것 같다. 한 사물에 담긴 세상과 더욱 친해질 것 같다. 그 안에 담긴 희노애락을 발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