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칠마루 Aug 22. 2022

溫故知新

2022. 8월 을지훈련 첫날 바뀐 모습을 보고 나서

10여 년 전만 해도 을지훈련이 시작되는 첫날엔 새벽 5시면 일어나야 했다. 왜냐하면 6시에 비상응소 연락이 오고 그로부터 1시간 이내에 회사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초임 시절만 해도 이 날 늦으면 여러 사람들에게 꾸중을 듣게 되니 늦으면 안 된다는 신신당부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2010년 소방관이 된 이후로 매해 여름 8월 이맘때쯤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비상 응소하라는 문자를 기다렸다가 회사로 출발하는 일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회사에 오는 시간이 7시까지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6시 40분 이전까지는 도착했기 때문에 응소 발령된 지 얼마 만에 도착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윗분들도 많았다. 그래 이왕 하는 거 늦는 것보다는 낫지라는 생각에 나도 웬만하면 6시 30분 이전에 회사에 도착하려고 애를 썼다. 더구나 사는 곳은 서울이지만 근무지가 서울과 3~40km 이상 떨어진 경기권의 소방서를 다닐 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출발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과 거리를 생각해 달려간 회사에 도착하면 또 다른 절차가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응소 신고 및 비상응소부에 서명하는 일이었다. 그냥 회사에 도착했으면 응소부에 이름 적고 서명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아쉽게도 내 생각처럼 이뤄지진 않았다. 2층 사무실이나 강당 또는 회의실로 향한다. 장소는 매해 달라진다. 그러면 누군가 약 7~8m를 청테이프로 붙여놓아 길을 가리켜놓았다. 테이프가 붙여진 곳부터 그 길을 따라 뛰어간다. 꼭 뛰어가야만 한다. 안 그러면 다시 신고해야 한다. 그 길 끝부분에 소방서 넘버 투인 소방행정과장님이 앉아 있다. 그럼 그분을 보고 멈춰서 큰소리로 신고를 한다. " (경례 후), 00 센터 소방장 000 응소" 그럼 그 과장님이 경례를 받아주신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온 뒤 응소부에 이름을 적고 서명하는 순서로 이뤄졌다.  만약 신고 전에 천천히 걸어가거나 신고할 때 목소리가 조금만 작아도 윗분의 "다시"라는 말을 듣게 되고 신고절차를 윗분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왜 목소리를 크게 해야 하는지, 신고 전 과장님이 계신 곳까지 왜 뛰어가야 하는지는 모른다. 속시원히 설명해줄 사람도 없었다. 아마 내 생각엔 예전부터 해왔던 방식이라 그대로 따라왔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소방은 군대가 아니지만 엄연한 계급사회이기에 때론 군대보다도 더 후진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데 이게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한다. 암튼 2016년까지만 해도 을지훈련 첫날엔 비상응소를 하며 이런 허례허식을 치러야 했다. 


지난 정부 5년간은 을지훈련과 관련해서 비상응소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 을지훈련이 다시 시행됐다. 하지만 두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 마치 이등병처럼 큰소리로 신고하는 모습과 비상 응소하는 인원 범위를 조정한 것이다. 이젠 예전처럼 첫날 비상 응소하지 않아도 된다. 나처럼 현장에 출동하는 대원들은 응소 제외자로 분류되어 응소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내근직원들과 센터장님만 응소하는 걸로 바뀌었다. 바뀐 점이 하나 더 있다. 신고하기 위해 달려가서 큰소리로 "00 응소" 외치지 않고 간단히 응소부에 서명하는 걸로 절차가 간소화됐다. 왜 이렇게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무작정 따라 했던 일인데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다행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과거에 하던 일만 되풀이하면 그건 퇴보의 지름길이다. 하지만 조금만 돌이켜 생각해보자.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부분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대한 합리적으로 바꿔보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을지훈련 비상응소의 불합리한 점이 개선된 게 어느 자리에 계신 높은 분이 힘써주셨는지, 아님 실무자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인 지는 알 수 없다. 나도 윗분들 덕만 바라보지 않고 내 자리에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일해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용어설명

을지훈련 : 을지연습(국가비상사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종합적으로 비상대비 업무를 하는 훈련)이라는 용어를 쓴다. 하지만 우리들은 을지훈련이라고들 부른다

비상응소 : 훈련 또는 비상 상황 시 공무원의 비상소집, 문자 받으면 1시간 이내 회사로 복귀해야 함

비상응소부 : 응소결과를 적는 서식, 응소시간과 소속, 계급, 서명을 적는 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전 09화 방문 판매하는 두 사람의 차이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