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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ul 04. 2022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 이송

2014. 4. 24. ~ 4. 25. 진도 팽목항 파견

난 13년 차 소방관이다. 그중 5년은 구급대원(환자 처치 및 병원 이송), 1년은 육아휴직, 6개월은 내근(외근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일반 행정공무원과 같은 역할. 실제 출동하는 소방관들을 보조하는 출동 관련 행정업무를 처리함, 한마디로 시청 공무원 정도로 이해하면 됨, 생각보다 일이 많아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8~9시 정도에 퇴근하는 경우가 많음), 나머지 6년을 화재진압대원으로 살았다. 오늘은 진도 팽목항 파견 때 있었던 일에 대해 쓴다.     


2014년 4월 16일 난 00시 00읍에 있는 지역대(주로 시골에 있으며 규모가 작다. 펌프차 1대, 구급차 1대 팀당 4~5명이 근무함)에서 2교대로 24시간 근무중이었다. 물론 구급대원이었고 불이 나면 구급차를 끌고 불도 끄는 일명 멀티 소방관이었다. 당시엔 소방관 숫자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물론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다). 지역대는 소방관이 부족하니 의용소방대원(정식 소방관은 아니며 주로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각종 현장 활동을 도와줌-교통 통제, 재난 현장 안내, 초기 화재진압 등)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의용소방대원들은 그 지역 거주민들이라 지역 사정에 훤했고 특히 재난 현장에 출동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물론 그분들도 지역대를 자주 찾아와 차도 마시면서 동네 사랑방처럼 만남의 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평소와 똑같은 날이었다. 그날도 여전히 사무실에선 의용소방대원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사무실의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밑으로 긴급 속보라는 자막이 떴다. 아마도 ”세월호 가라앉는 중“이라고 기억한다. 화면에선 여객선이 옆으로 뒤집힌 모습이 나오고 있었으며 그 배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 중인 단원고 아이들 등 수백 명이 탑승 중이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2년 남짓, 경비함을 타본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1만 3천 톤 내외의 배에는 파도에 뒤집히는 걸 막는 Anti Rolling tank. Stabilizer 등 여러 장비가 있을 텐데, 또 수십 년 경력의 선장과 항해사들이 있을 텐데,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나지? 지금 뒤집힌 저 배 안에서는 생난리가 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배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빠져나올까? 전남 진도와는 거리가 400km 이상 떨어져 있으니 일단 난 여기서 내 할 일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전원 구조했다는 자막이 나왔다. 한편으론 그게 가능할까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인명피해가 없어 다행이라는 2가지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구조했는지는 몰라도 정말 대단하다, 마땅히 표창받아야겠다는 말도 했다. 다시 얼마 후 전원 구조는 오보이며 여전히 배는 가라앉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결국 배는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구조된 사람보다 배 안에 남아있는 사람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며칠이 흘렀다. 수학여행을 간 단원고가 경기도 안산 지역이라 경기도 소방관, 특히 구급대원들이 진도 팽목항으로 소집 명령을 받았다. 34개 소방서에 있는 구급차를 골라 몇 차례에 걸쳐 한 번에 6대 정도의 구급차를 파견하는 방식이었다. 난 2차로 선정된 파견 구급대원 명단(이하 2진)에 있었다. 새벽 4시 30분에 00 지역대에서 출발해 10시 이전까지 진도 팽목항까지 가야 했다. 동료와 같이 번갈아가며 무거운 마음으로 운전했다. 거리가 460km쯤 되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휴게소는 단 한 번 그것도 화장실만 갔다 왔다. 아침도 거르고 집에서 가져온 우유로 때웠다.      


팽목항에 도착하니 이미 취재진과 유족 등 많은 사람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경기소방에 차린 임시 본부는 팽목항 방파제 바로 앞에 있었다. 그리로 가니 이미 도착한 다른 구급대원들이 있었다. 몇 분 기다려 간단한 브리핑이 시작됐다. 1차로 도착해서 3일간 있었던 구급대원들이 다음 날 원대 복귀한다. 이곳의 업무 처리 과정은 다음과 같다. 바다에서 수습된 시신 → 팽목항 도착 → 신원 확인 → 유가족이 원하는 장소에 희생자와 유가족을 구급차로 이송 즉, 본부에서는 타 기관과의 공조, 팽목항 현장에서의 구조대원과 구급대원의 지원 업무를, 구급대원인 나는 유가족과 희생자를 유가족이 원하는 장소로 이송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당시 팽목항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이 몰려들었고 여러 기관(도청, 소방, 경찰)에서 나와 있었다. 공간도 부족하고 사람도 많아 모텔 같은 숙소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간이 천막은 몇 개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내일 원대 복귀하는 팀에서 사용 중이었다. 몇 시간 뒤 나를 포함한 2진은 다시 목포에 있는 어느 체육관에서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소방관은 반 군인이라고 보면 된다. 위에서 지시하면 그대로 그 지시를 따르면 된다. 목포로 올라가 4시간쯤 있었을까? 그 4시간 동안 여전히 짬을 내어 운동장을 달리고 운동을 한 후 간단히 샤워까지 마쳤다.      


갑자기 팽목항으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날 여러 희생자의 시신이 수습되었고 다시 경기도로 이송했기 때문에 현장에 대기하는 구급차가 모자란 상황이었다. 지시를 따라 팽목항에 도착하니 저녁 7시쯤 되었다. 다시 본부에서 브리핑이 이어졌다. 잠은 구급차에서 대기하며 자고 김밥과 컵라면이 있으니 알아서 먹을 것, 무전기를 항시 들고 다니며 호출받은 구급차는 즉각 출동준비를 마칠 것, 유가족들이 원하는 장소로 이송할 것, 논스톱으로 안산까지 운행할 수 있으니 화장실 문제는 미리미리 해결하라고 했다. 개별 인터뷰는 절대 안 되며 담배 피우는 것도 조심하라고 했다. 그리고 기다림이 이어졌다. 4월이라 생각보다 추웠다. 차 안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우리가 밥을 먹는 천막이나 구급대원 대기장소(주로 차에서 대기)는 유족이 시신을 확인하는 곳과 불과 10m 거리였다. 간혹 밥을 먹거나 차 안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면 유족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절절한 슬픔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난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었고 2~30분 남짓이라도 쪽잠을 잤다. 같이 슬퍼할 수는 없었다. "난 소방관이니까, 맡은 업무를 해야 하니까"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어쩔 수 없이 슬픔은 잠시 뒤로, 마음속으로 깊이 묻어 두었다.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수습한 시신이 하나도 없는 날도, 갑자기 여러 명을 수습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팽목항에 도착한 다음 날 오후 3시쯤으로 기억한다. 수색하던 배가 방파제에 도착했다. 얼마 지나 유가족이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울음소리가 들렸다. TRS 무전기에서 ”00 구급차 이송 준비할 것” 지시가 흘러나왔다. 무전을 듣자마자 서둘러 화장실로 가서 방광을 비웠다. 10여분쯤 지났을까? 이송이 시작되었다. 희생자의 시신이 안치된 관을 주들 것(스트레처 카)에 올린 후 구급차 안으로 조심히 밀어 넣었다. 다음으로 유가족 두 분에게 시신 옆 의자에 앉으시라 말씀드렸다. 목적지는 안산의 00 장례식장이었다. 약 400km를 운전하는 동안 유가족의 요청으로 딱 한 번 정차했다. 출발할 때 목적지를 알리는 무전 외에는 아무 말소리도 없었다. 간혹 들리는 유가족의 울음소리만이 차 안에 가득했다. 다른 때보다 특별히 더 신경 써서 운전했다. 희생자의 마지막 가는 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었다. 몇 시간이 흘러 유가족이 요청한 00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희생자가 안치된 관을 장례식장 관계인에게 인계했다. 이미 장례식장에 도착한 다른 유족이 한사코 밥을 먹고 가라는 걸 완곡하게 거절했다. “아직 남아있는 업무가 있습니다” 착한 거짓말이었다. 도저히 그 상황에서 뭔가를 먹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사히 원래 근무지로 복귀했다.  

   

내 친척이 그 현장에서 희생된 건 아니지만 그 뒤로 세월호 관련 뒤처리를 보면 참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세월호 진상조사를 위해 단식 농성하는 곳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는 어이없는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욕을 많이 했다. “아이가 죽어 울부짖는 부모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냐? 단식으로 그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 앞에서 게걸스레 음식을 처먹는 그 행동은 무엇이냐? 그러고도 너희가 사람이냐” 이렇게 따지고 싶었다. 지금도 세월호가 지겨우니 그만하자는 댓글이나 기사를 볼 때면 여전히 화가 난다. 하지만 참아야겠지, 아직도 모든 과정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안타깝게 죽은 희생자와 유가족들이 충분히 차고 넘칠 만큼 위로받았으면 좋겠다. 그 후에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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