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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ul 05. 2022

구급대원의 Trauma

5년간의 활동 중 2번의 경험

5년간 구급대원으로 살았다. 그동안 피곤함과는 늘 친하게 지냈다. 구급출동은 1건당 빠르면 30분, 길면 1시간 30분 정도 활동하는데 그게 시간차를 두고 일어난다. 보통 1건의 출동이 밤새 이어지지 않는다. 1시, 2시 5분, 5시 12분, 7시 20분 이런 식으로 밤새 구급출동이 걸린다. 그러면 밤을 꼬박 새우게 되고 거의 좀비가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내 몸의 절반만 깨어 있고 나머지 절반은 자고 있는 그런 이상한 느낌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구급대원으로 일하다 보면 다쳐서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보게 되는 건 일상이다. 게다가 끔찍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분들이나 자살로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을 일반인에 비해 거의 3~40배(내 생각일 뿐입니다) 이상 접하게 될 기회가 많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보게 됐을 때는 그 상황에 별다른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상황에 내 감정이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게 점점 시간이 지나다 보면(사람마다 다르다. 나 같은 경우는 2년째 1번, 3년째 1번 총 2번의 trauma 경험이 있다) 쌓인 감정의 찌꺼기들이 터진다. 그걸 Trauma(정신적 외상)라고 부른다.    

 

13년 10월쯤일까? 오토바이 단독으로 교통사고가 난 현장에 출동했다. 오토바이 운전자 혼자서 헬멧도 쓰지 않은 채 빗길에 미끄러져 사고가 난 상황이었다. 더구나 술에 취한 상태라 환자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동료와 그 사람을 처치하러 가까이 다가가자 환자의 뒤통수 부위에서 피가 흘러내린 모습이 보였다. 그 피를 보자마자 갑자기 그날 점심때 봤던 자살 사건이 떠올랐다. 

    

20대 중반의 여자가 홀로 자살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다른 자살 사건과는 달리 환자의 입술 부분이 유독 까맸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어느 정도 사후 강직이 진행된 상태였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경찰에 현장을 인계하고 나왔다. 하지만 인계를 마치고 나서도 그 환자의 까만 입술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겐 그 모습이 유독 끔찍하게 느껴졌나 보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몇 시간 지나 교통사고 환자가 흘린 바닥의 흥건한 피를 보자마자 점심때 나갔던 자살한 환자의 까만 입술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바로 호흡이 거칠어지고 손이 덜덜 떨렸다. 진정이 되질 않았다.     


이 상태로는 환자에게 응급처치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처치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얼른 동료에게 상황을 얘기했다. “나 지금 Trauma 왔다, 아무래도 아까 자살한 환자 본 후 그 모습이 남아 있어서 이런 거 같다. 미안한데 잠시 혼자 처치 좀 해줄래, 진정하려면 2-3분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 동료는 갑작스레 상태가 나빠진 나를 염려하며 흔쾌히 혼자서 환자에게 처치를 이어갔다. 원래는 구급대원 둘 모두 달라붙어 환자를 처치해야 하는데 내가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급한 환자가 아니었다. 머리 뒤통수 부분의 상처 말고는 다친 곳은 몇 군데의 찰과상 정도였다. 머리에 붕대를 다 감을 때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다시 동료와 응급처치를 이어갔다. 동료는 계속해서 내게 괜찮냐고 물어봤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회사 차원에서 우리에게 원활한 상담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저 동료나 날 이해해 줄 만한 사람들과 밥 먹으며 술 마시며 “나 이런 경험이 있었다, 힘들었다” 얘기하며 혼자서 Trauma를 삭이는 수준이었다.   

      

원래 구급차는 운전 및 처치 보조 1명과 주처치 1명 총 2명으로 이뤄진다. 요새는 운전 1인, 처치 2인 총 3인의 구급대원으로 운행되는 구급차가 있다. 하지만 몇 대 없다. 아직까지 절대적으로 부족한 소방관 수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튼 주처치 담당인 동료가 휴가를 가서 어쩔 수 없이 응급구조사 2급 자격증이 있는 내가 주처치 담당이 되었고 펌프차를 타던 다른 동료가 구급차 운전을 하게 됐었다. 흔히 땜빵 근무한다는 표현을 쓴다. 땜빵 근무를 할 때면 응급처치 책을 한 번이라도 더 찾아보며 읽게 된다. 혹시라도 환자의 나쁜 상황을 알아채지 못할까 염려하며 땜빵 근무 며칠 전부터 집중적으로 환자의 상태별 주요 처치법을 물어보고 배우며 익힌다.      


두 번째 Trauma는 16년 5월 경 내가 땜빵 근무를 할 때였다. 아파트에서 엄마가 떨어졌다는 신고였다. 막상 현장에 도착했는데 추락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그분은 1층에 있는 자전거 보관대 옆과 1층 외벽 사이의 덤불에 빠져 있었다. 얼른 들것으로 환자를 옮겨 가슴을 압박했다. 제세동기(요새는 심장충격기라고 함, 우리는 제세동기라 부름)를 몸에 연결하니 웬걸 맥박이 분당 220이었다(정상인 분당 60~100). 화들짝 놀라 의료지도 의사 선생님에게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 

나 : 00 구급대원 소방교 00입니다(소방서, 관등성명을 말하는 게 원칙입니다). 현재 아파트 15층에서 추락한 50대 여성 환자를 1층에서 발견 후 CPR(심폐소생술) 진행하려 합니다. 환자 의식, 자발 호흡 없고 맥박이 분당 220입니다.

의사 : 얼른 CPR 진행하면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하세요

나 : 네, 알겠습니다.    

 

심폐소생술을 하며 환자를 이송하려는 찰나였다. 일단 평평한 곳에 옮기니 덤불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치명적인 상처를 발견했다. 머리의 1/4 부분이 떨어져 나가 뇌수가 보였다. 명백한 사망의 징후였다(이런 경우 CPR 하지 않고 바로 의료지도 의사 선생님 연결 후 상황을 종료합니다. 우리가 사망선고를 할 수 없기에 현 상황을 보고하면 의사 선생님이 판단을 내립니다. 경찰에 현장 인계 후 구급대원은 철수합니다). 다시 의료지도 의사 선생님을 연결했다.

나 : 조금 전 아파트 추락 건으로 연락한 00 소방서 소방교 00입니다. CPR 하려는데 명백한 사망의 징후가 있어 다시 전화드렸습니다. 환자 머리뼈의 1/4이 사라져 뇌수가 보입니다. 현재 맥박은 300을 넘어섰습니다.

의사 : 네, 돌아가셨다고 볼 수 있네요, 현장에 경찰은 도착했나요?

나 : 현장에 경찰 있습니다.

의사 : 상황 종료하시고 경찰에 인계하세요, 뚝(통화 끊김, 의료지도 연결 의사는 많이 바쁩니다. 그래서 필요한 말만 하고 바로 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파트 1층에는 추락 환자의 큰 딸이 나와 펑펑 울고 있었다. 환자의 맥박은 300을 넘었다가 다시 250으로, 다시 200 밑으로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엄마 좀 살려주세요”라고 울면서 말하는데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 말 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주섬주섬 응급처치 장비를 챙겼다. 늘 처치 보조만 하다 주처치 담당으로 자리를 바꾼 날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내 안에서 한바탕 태풍이 몰아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사무실에 복귀하니 그제야 긴장이 풀어졌고 후폭풍이 몰아쳤다. 추락한 환자가 덤불 안에 구겨진 채 있던 모습, 큰딸의 펑펑 울던 모습, 환자의 맥박이 300을 넘어섰다 천천히 떨어졌던 기억이 났다. 심장은 살아보려고 그렇게 몸부림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 모습도 생각났다. 무서웠다. 무력감이 찾아왔고 한 30분 정도는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이번에 제대로 Trauma 온 것 같은데 어쩌나”라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건 내 걱정일 뿐, 시간은 내편이 아니었다.     


다시 또 출동이 걸렸다. 50대인 남편이 화장실에 쓰러졌다는 내용이었다. 단순 낙상환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장에 도착해보니 그 환자는 임종 호흡 중이었다(정말 위급한 증상으로 발견 즉시 심폐소생술을 해야 합니다). 부랴부랴 심폐소생술을 진행했다. 환자의 집 안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흔들리는 구급차 안에서 환자가 살아나길 바라며 소생술을 실시했다. 동료는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총알택시처럼 달렸다. 하지만 병원에 환자를 인계할 때까지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환자를 병원에 인계하고 돌아오는데 조금 전까지 날 사로잡았던 무력감은 어느새 저 멀리 도망가 있었다. 신기했다. 1시간 만에 힘든 출동 2번을 연이어하고 나니 집 나간 정신이 똑바로 찾아오나 싶었다. 일은 일로 잊히는 건가 생각했다. 그 뒤로 6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Trauma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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