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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un 26. 2022

막상 소방관은 한 일이 없다, 그저
돕기만 했을 뿐.

김포 생활치료센터

소방관은 시도 소속이다. 또한 소방청에도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둘인 조직이다. 소방청과 시도에서 모두 감찰이 나온다. 인사, 예산이 지자체에 있어서 지자체가 일하는 경우 곁가지로 소방이 참여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중 하나가 코로나 생활치료센터(이하 생치라 한다) 파견근무다.     


실상 소방관이 구급차를 몰지 않는 한 생치에서 할 일은 크게 없다. 내가 생치에서 일할 때는  화재나 구조 상황 발생 시 인근 관서에서 출발한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초동 조치를 하기 위해 2주간 파견되었다. 내가 파견된 곳은 경기도 김포의 한 생치였다.      


일단 김포 생치에는 코로나 치료를 위해 평균 300여 명 정도의 환자가 입소해 있었고 최소한 우리나라, 태국, 중국, 인도, 러시아 등 6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안내방송만 해도 러시아어, 영어, 한국어, 중국어가 나왔다. 그리고 그 환자를 돌보기 위해 3-40여 명의 의료팀(의사, 간호사로 구성), 기타 지원팀 10여 명(쓰레기 수거, 퇴실 환자의 방 청소 등), 군인 10여 명(의약품, 식사 전달), 경찰 5~6명(시설 경비), 소방 1명(재난 시 초동 조치 및 환자 수송 시 구급차 수배), 행정팀(도청 공무원 10명, 환자 입퇴소, 의료 물품, 식사, 방 배정, 각종 민원 해결)으로 약 80명 정도가 일했다.      


생치의 일과표                    


생치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됐다(8개월 전 기억을 끄집어 내는 일이니, 정확하지 않음을 미리 밝힌다). 그리고 일과표 중간 비는 시간 사이 진료를 위해 환자동에서 환자가 X-ray 검사실로 나오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의약품 요청에 급하게 지원팀이 환자 격리동에 물품을 가져다 두는 일도 있었다. 다만 어느 상황이건 환자와의 직접적인 접촉은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행정팀(도 공무원)들은 아주아주 많이 바빴다. 내가 처리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본 일들만 쓰겠다. 경기도에서 제일 큰 시설인 탓에 입퇴소하는 환자가 하루에 1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다국적자들로 모인 곳이다 보니 음식 투정(나 이슬람이야, 고기 빼줘, 채소 빼줘 등)이 많았고 담당 공무원들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구글 번역기를 통해 대화했었다. 구글 번역기를 이용할 때도 한 번에 원하는 뜻으로 번역이 되지 않았다. 2~3번 이상 재번역을 해야 우리가 원하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입소하는 환자들이 시간에 맞춰 체온과 산소포화도를 재서 알려줘야 하는데 인터넷 애플리케이션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이나 외국인들은 정말 해결 방법이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때마다 옆 사람의 도움(2인 1실이어서 옆 사람이 한국말 하는 경우)을 얻거나 이 방법, 저 방법을 써서 겨우겨우 해결하기도 했다.      


또 입소한 환자들이 어찌나 전화하던지, 심지어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들은 SNS를 이용해서 원하는 바를 표현했다. 그 당시 내가 기억하는 민원은 이렇다. 따뜻한 물 주세요, 드라이기 주세요(화재 염려로 인해 커피포트, 드라이기, 난로, 라이터, 담배 등 모두 불가), 핸드폰 충전기 주세요, 과자 먹고 싶어요, 옆 사람이 너무 시끄러워서 힘들어요, 물 주세요, 더우니까 온도 낮춰줘요, 아이 그림 그릴 색연필 주세요(아이와 부모가 같이 입소하는 경우), 택배로 음식 왔으니 얼른 주세요, 담배를 피우고 싶어요 등 하루에 약 200통 이상의 전화 민원이 쏟아졌다. 여기는 호텔 프런트가 아닌데 그런 민원 전화를 받을 때면 난 생치 상황실에 근무하는 직원이 아니라 호텔 프런트에서 투숙객을 응대하는 느낌이었다. 그 역시 도청 공무원들의 몫이었다. 환자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없을 때는 그들을 어르고 달래기도 했다. 준비할 수 있는 물품은 식사 전달할 때 물건을 환자가 머무는 방 앞에 놔두는 걸로 마무리를 지었다. 게다가 생치 상황실은 24시간 근무를 해야 하니 2명씩 돌아가며 밤샘 근무를 하기도 했다.     

 

특히 입퇴소의 경우 그들이 입퇴소할 때 쓸 기본 물품(비닐 가운, 비닐장갑, 안내서, 마스크, 덧신 등, 입소 팩과 퇴소 팩이라 불렀다)을 정리해서 개인별로 줄 수 있게 포장하는 일은 오롯이 행정팀의 몫이었다. 내가 일했던 시기의 행정팀과 군, 소방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 그래서 맡은 업무는 달랐어도 바쁠 때 전화를 대신 받아준다거나 입퇴소 팩 작업(평균 작업시간 1~2시간, 최소 4명 이상이 달라붙어 만들어야 함)할 때 서로서로 도와주는 화목한 분위기였다. 힘든 곳일수록 직원 간의 끈끈한 팀워크가 있는 회사처럼 내가 근무하고 싶었던 이상적인 분위기에서 2주간 잘 지냈었다.     


코로나에 걸린 것도 아닌데 생치에 2주간 있다 보니 없던 반찬 투정이 생겼다. 특히 세 끼가 모두 도시락으로 나왔다. 편의점 도시락에 비해 2단계쯤 높은 수준으로 처음 먹었을 때는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1주일 별로 메뉴가 반복해서 나오는 구조였다. 이번 주 월요일 메뉴는 다음 주 월요일에 나오는 식으로 요일별 메뉴가 같았다. 그래서 1주일이 지나고 같은 메뉴가 나오자 점점 질리게 됐고 종종 컵라면을 먹기도 했었다. 또한 센터장님의 격려금으로 생활치료센터에서도 야식을 배달시켜봤다. 밖에선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피자와 치킨이지만 생치에서 먹는 건 색다른 맛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 두 분 팀장님은 번갈아 가며 사비로 팀원들이 각자 원하는 음료를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당시 김포 생치는 4년 정도 비어있는 건물을 약 1달 정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생치로 쓰는 상황이라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이 있었다. 일단 환자들이 머무는 방안의 시설들이 오래되어 수시로 고장이 났다. 변기나 세면대가 막히거나 인터넷 선도 가끔 단선된 곳이 있었고 난방, 전기 문제도 있었다. 그런 문제들로 인해 공실률이 약 30% 정도였다. 고장이 난 방은 코로나 문제로 인해 소독이 끝날 때까지 쉽게 수리할 수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방 배정을 담당하던 주무관님은 계속되는 작업으로 피곤해졌지만 여유롭게 처리했다. 참 보기 좋았다.      

2주 동안 행정팀이 하는 일을 도울 뿐이었지만 일하는 동안 행정팀과 군, 소방은 한 팀으로 잘 지냈었다. 생치 근무가 끝나면 날 잡아서 한 번 모이자는 말도 있었지만 끝나고 다시 원대 복귀하다 보니 서로의 바쁜 업무 일정으로 인해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막상 쓰고 보니 난 소방관으로서 한 일이 없다. 그저 돕기만 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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