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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곳적 시간이 담긴 칼바리

칼바리 구석구석 탐방

by 보듬 Mar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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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리에서의 하루는 쭉쭉 잘도 갔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이미 짜인 일정대로 움직이는 것이 살짝 귀찮은가 싶다가도, 오히려 그렇기에 의미 있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는 걸 안다. 아침부터 밤까지 촘촘하게 칼바리를 느끼고 다녔다.



침 6시가 안 되어 일어났다. 어제의 여독으로 찌뿌둥한 몸. 피곤하지만 다른 이들과 화장실을 써야 하니 부지런을 떨어야겠다 싶었는데 웬걸, 내가 꼴찌로 씻었다. 옆 방 신혼부부도 꽤나 부지런한지, 아니면 공유 숙소 탓인지 서두른 모양이었다. 그 덕에 편한 시간에 여유 있게 씻었다. 아침도 든든히 챙겨 먹었다.


부지런히 아침 식사를 하고 펠리컨 구경을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역시나 해가 쨍해서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펠리컨 먹이 주기는 몇 십 년째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 덕에 지속되어 온 행사라고 했다. 먹이를 줄 봉사자가 오기도 전에 펠리컨들은 이미 찾아와 있었다. 푸르디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펠리컨들이 식사하는 걸 지켜보았다. 펠리컨들이, 던져 주는 생선을 커다란 입으로 백발백중 받아 먹을 때마다 크고작게 "와" 소리가 터졌다. 갈매기들이 펠리컨 주위를 맴돌며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 들었지만, 배를 채울 기회는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물고기를 던져주는 체험에도 직접 참여해 보기도 했다. 미끌미끌하고 비린내가 나는 생선을 받아 들더니 잘도 던져주었고, 펠리컨은 입을 벌려 쏙 빨아들이듯 꿀꺽 삼켰다. 사람과 어울리는 펠리컨이라니! 볼수록 신기할 노릇이었다.


 우리는 칼바리 트래킹에 나섰다. 네이처스 윈도, 스카이 워크와 Z협곡까지. 많이들 찾는 포인트 세 군데를 들르는 일정이었다. 넓디넓은 칼바리 국립공원을 차로 이동하고, 또 내려서 걷는 것을 반복하며 광활한 자연의 신비를 느껴 보는 시간이었다.


퍼스에 있을 때보다 더 더웠다. 적도 부근에 가까이 한참 북쪽으로 올라왔으니 당연할 일이나, 몸은 바뀐 기후에 금세 적응하지 못했다. 거의 건식 사우나에 있는 듯했다. 얼음물은 사르르 금방 녹아버리고, 화장실도 자주 가지 않는데 자꾸 입만 타들어 갔다. 사막 기후가 이런 것일까.
우리나라에서의 트래킹이라면 골짜기 사이사이를 걸어 산을 오르거나 무성한 숲을 걸으며 좋은 공기도 들이마시는 것일 텐데, 여기는 거의 맨땅에 자란 다육식물이나 보고 듬성듬성 얕은 수풀들 사이로 평지를 걷는 것이었다.


겹겹이 어긋나 쌓인 황토색 지층 조각들을 밟고 오른 네이처스 윈도 부근은 풍광이 정말 멋졌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끝없이 펼쳐진 땅을 본 적이 있었던가. 어디든 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진 풍경에 익숙한 내게는 낯설었다. 인간들이 출현하기 전의 지구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태초의 모습인 걸까.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고 문명이 장악하지 않은 자연은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 우리를 비롯해 풍경을 마주한 이들은 윈도 배경화면 같다는 표현들에 너나없이 공감했다.


인스타그램 같은 데서 간혹 보았던 '사람들이 절벽에 매달려 있는 듯이 찍는 사진'을 어떻게 찍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사실 발을 디딜 바닥이 있지만 사진에 담지 않는 것뿐이지만, 자꾸 사람들이 바위에 매달리는 것이 위험해서 이제는 금지되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Z협곡. 왕복 40여분의 트래킹인 데다, 이미 누적된 더위와 피로로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꾹 참고 길을 나섰다. 정말 더위 먹은 듯 힘들었지만, 멋진 풍광을 눈에 담을 수 있어 좋았다.


더위에 지친 여행객에게 제공된 특별 간식은 김치말이국수였다. 주재료는 냉면 육수와 소면, 김치 정도의 간단한 구성이었지만, 이 날 이 식사가 호주 여행 중 제일 맛있는 식사였다. 땀을 뻘뻘 흘리고 난 후 얼음 동동 육수를 들이켤 때의 감동이란! 가이드님의 음식 솜씨 덕에 호사를 누렸다.


일몰 전에 자유시간이 좀 주어졌다. 바다 물놀이도 궁금했지만 감히 햇볕 앞에 맨몸을 내보일 용기가 없어서 포기하고, 동네의 카페로 향했다. 바다 보며 멍하니 여유를 즐겨 볼 작정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빵집인지 카페인지 휴게소인지 모를 콘셉트의 가게에서 불어 터진 파스타와 목 막히는 초콜릿 케이크에 갈증만 더하고 나왔다. 아쉬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품 가게도 둘러보고, 바닷가도 거닐어 보고, 슈퍼에서 물도 좀 샀다. 좋은 산책이었지만, 불과 한 시간 남짓의 외출에 더위에 빠삭 익어 버린 기분이었다. 넋도 진도 다 빠져나가서, 싹 샤워하고 에어컨 쐬며 쉬었다.


일몰을 보러 가기 전, 야생동물들을 못 봤다는 고객(?)들을 위해 가이드님이 캥거루 관람을 시켜 주셨다. 정말, 흔하디 흔한 주택가에서 캥거루와 이뮤를 만났다. 주택들 사이 빈 땅에 캥거루와 이뮤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캥거루와 이뮤가 바닷가를 배경으로 풀 뜯는 모습이 꽤나 이국적이고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야생동물들이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풀을 듣고 있다니. 우리나라로 치면은 멧돼지나 곰 같은 애들이 동네에 내려온 건가. 아니면 집 없는 강아지들이 마을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인 건가. 야생동물들의 성정이 순한 것도 이 동네 사람들의 복이겠지 싶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야생동물을 근처에서 만났다, 하면 목숨을 부지할 방안을 마련해야 할 텐데 싶고. 아, 고라니 정도는 괜찮으려나.


일몰의 시간. 구름이 많이 껴서 노을이 강렬하진 않았지만 그저 좋았다. 인도양 너머 지는 태양이라니. 몇 계절 전에 발리에서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감탄했던 인도양의 노을은 마냥 예뻐 보였는데 여기서는 좀 달랐다. 남편과 손 붙잡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데 괜스레 마음이 울렁이는 게, 왜인지 모를 슬픔에 사로잡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고 소중하고 시간이 또 한 번 지는구나 싶었던가. 명확히 정의하긴 어려운 느낌이었다.


저녁은 돼지고기구이와 된장찌개였다. 호주는 소고기보다 돼지고기가 비싸다는 얘기를 들으며, 저 먼 고향 땅의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또 별을 보러 나섰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구름이 가득하고 달빛이 밝아 별을 헤어 보기가 어려웠다. 칼바리 산 동네는 낮에는 그렇게 덥더니만 어느새 또 바람은 매섭고 공기가 차져 있었다.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캥거루 펀치 그림 기모 집업을 입고 찬 바람에 맞서다 돌아왔다. 남반구의 별을 잘 보고 싶다면 겨울에 다시 찾으라는 가이드님의 말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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