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에 멀어져야 하는 우리

주제 노트. 닮은 구석을 안고 살아가면서 우리는 왜 더 멀어질까

by 가랑비메이커

내게 거울 같은 당신, 아버지


어릴 적부터 유독 아버지와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나 동네 이웃들이 함께 탄 엘리베이터에서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재잘거리던 입은 꾹 닫혔다. 그 입은 이따금 삐쭉거리거나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섭리 앞에서 울어버리고 마는 나를 보며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유독 자신을 잘 따르던 막내딸이었으니까.

사실은 나도 그 눈물의 이유를 잘 모르겠다. 겨우 생각해낸 것이라고는 늘씬하고 하얀 엄마가 아닌 그을린 피부와 강렬한 인상의 아빠를 닮았다는 말이 어린 내게는 가혹했을지도 모른다는 정도.

그럼에도 거스를 수 없는 섭리로 인해 나는 아빠를 무척이나 닮았다. 짙은 눈썹과 뚜렷한 이목구비, 조금 노란 피부. 낮은 목소리.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성향까지도 아빠를 쏙 닮았다. 쉽게 뽑히거나 흔들리지 않는 주관과 불의를 보면 생각보다 앞서는 행동, 용의 꼬리가 될 바에는 뱀의 머리가 되어야만 하는 성격, 한번 화가 났다 하면 불이 붙어버리는 눈빛. 이와는 반대로 눈물과 정이 많은 것까지도 닮았다.

그래, 나는 그 누구보다도 아빠를 닮은 아빠의 딸이다.





닮은 구석을 안고 살아가면서

왜 우리는 더 멀어질까



아빠와 잦은 갈등을 나눠 가졌던 이유는 다름이 아닌 닮음에 있는 걸까? 이 물음의 시작은 3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30년 가까이 다녔던 직장에서 은퇴한 아빠는 돌연 타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노라고 선언했다.

한 지붕 아래에 아침을 깨우고 저녁을 닫는 우리 부녀의 삶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줄로만 알았지만, 아빠의 선언 이후로 우리는 짧은 시간의 비행을 사이에 두고서 서로 다른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작은 채팅창으로 아침식사 여부와 달라진 헤어스타일을 주고받았지만 우리 사이에는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간격과 온도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긴 시간을 서로의 삶에 얽매이고 기대 왔던 우리에게는 오래전부터 필요했을지도 모를 변화였지만 아직은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서로를 마주 할 때면 변한듯한 모습에 서운함을 느꼈고 괜한 다툼이 생기기도 했다. 갈등은 매일 함께 지내던 때보다도 더욱 날카롭고 깊은 골을 냈다.

그건 아마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공간의 틈 때문이었을 거다. 함께 머물 때는 자주 진동하며 포개지곤 했던 두 세계가 이제는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고, 점점 더 나이가 들어가는 아버지와 이제 더 자랄 데 없이 자란 딸에게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해졌기 때문일 거다.

변함없이 닮은 표정을 짓고 같은 말투를 뱉으면서 서로 다른 시간 속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닮은 구석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를 멀어지게 했다. 그러나 이건 나와 아버지에게서만 일어나는 서글픈 이별이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순리였다. 나라는 존재가 온전히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품었던 세계와 헤어져야 했다. 부모와 자식이라면 한 번쯤 겪어야 하는 순리였다. 그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그건 아마도 자식인 나뿐 아니라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멀어지는 연습 없이 멀어졌다. 이 또한 우리 부녀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쾅 닫힌 채 열리지 않는 문 앞을 서성이는 아버지
엄격한 어머니께 끝내 전하지 못한, 늦은 고민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부모 혹은 자식을 향한 원망과 그리움



조금씩 다른 모습이지만 우리는 모두 이 서글픔을 어디선가 이미 맡아보았고 그 언젠가 만져보게 될 것이다.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는 짙은 부채감으로 우리를 따라올 것이다. 부채감은 언제나 양방향이다. 자식으로서 느끼는 부모를 향한 부채감, 자식을 향한 부모의 부채감.

그 감정들은 이전보다 더 세심한 배려가 되어 관계를 굳게 만들어주기도 할 테지만, 도리어 관계를 무겁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자연스러운 일에도 옅은 긴장과 의무감을 느끼게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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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위해서는 멀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제는 그 형체 없는 부채감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왔음을 느낀다. 그 알 수 없는 줄다리기로 서로를 당기고 밀어내기에는 아버지와 딸, 부모와 자식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모른 척하고만 싶었던 그 사실을 이제는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아버지, 당신을 내려놓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는 연습을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 당신을 더 제대로 알아야만 했다. 우리가 멀어지는 것은 더욱 사랑하고 존중하기 위함이다. 그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프로젝트 <거울 같은 당신께 겨울 같은 우리가>는 출판사 문장과장면들의 기획자 가랑비메이커이자, 고준영의 막내딸 고애라를 시작으로 숱한 아버지와 자녀들이 함께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남겨두었고 그것은 인터뷰와 설문이 되었다. 용기를 내어 오래된 기억을 꺼낸 20명의 자녀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를 기록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당신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여전히 서툴고 오해투성이일지라도 그 모두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이해해줄 당신을 알기에, 우리는 마음껏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긴 세월 그늘로 비켜섰을 당신을 조명하는 이 페이지가 썩 마음에 드는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고준영의 딸, 고애라

2020년 새 계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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