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키비키 결혼생활
세상에 처음 날 때
인연인 사람들은
손과 손에 붉은 실이 이어진 채 온다 했죠
당신이 어디 있든
내가 찾을 수 있게
손과 손에 붉은 실이 이어진 채 왔다 했죠
_안예은, <홍연>
첫 만남부터 알아본 건 아니지만, 10년 넘게 함께 지내고 보니 우리의 영혼이 많이 닮아있다는 걸 느낀다. 그와 나는 '손과 손에 붉은 실이 이어진 채 온 인연'인 걸까.
남편은 어릴 때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컸다. 특별히 뭘 잘못해서라기보다는 알림장 글씨가 정갈하지 못하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맞았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 눈치가 빠르다.
나는 어릴 때 엄마 눈칫밥을 먹으면서 살았다. 역시 특별히 내가 뭘 잘못해서라기보다는 엄마가 살림과 육아에 지쳐있었기 때문에 삼 남매 중 유일한 딸인 내가 엄마의 감정받이가 되었다. 선천적으로도 감각이 예민하게 태어났는데 자라면서 더욱 감각과 직감이 발달했다.
서로가 눈치 백 단인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불편함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공감능력이 결여된 세상에 내 마음을 공감해 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남편이라니, 오히려 좋다.
무딘 남편을 만났다면 나는 외로웠을 것이고 상대는 나의 예민함 때문에 피곤했을 것이다. 다행히 둘째가라면 서러운 눈치를 가진 서로를 만난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맞추면서 살고 있다. 눈치력이 좋게 쓰이니 공감력이 됐다.
남편은 센스가 있어서 페인트칠, 전등교체, 가구 조립 같은 걸 잘 해내는 편이지만, 가까이서 지켜보면 손이 야무진 편은 아니다. 남편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사를 나무 바닥에 여러 차례 떨어뜨려가며 허술한 손길로 전등을 갈아주면 "으이그 똥손!"하고 면박을 주지 않고 "여보 고마워. 여보 덕분에 집이 환하다!"라고 말한다. 남편이 조립해 준 이케아 가구가 어딘지 모르게 엉성해서 '이게 맞나?'싶어도 "여보 고마워. 여보는 진짜 못하는 게 뭐야?"라고 말한다. 남편은 찰나의 순간에 내 표정을 눈치채고 내가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 다음에 또 부탁하기 위한 격려의 칭찬이라는 걸 알면서도 신이 나서 엉덩이를 씰룩거린다.
말을 예쁘게 하는 습관, 칭찬하는 습관은 결혼하고 남편에게 배운 것이다.
"귀여워 가지고."
"나는 여보가 진짜 너무 귀여워."
"귀여우니까 봐준다."
"아무튼 예뻐가지고."
"또 혼자만 예쁘네."
"아유 여보는 어쩜 그렇게 예쁘냐."
남편은 밑도 끝도 없이 '귀엽다. 예쁘다.'를 남발한다. 내가 진짜 예쁘고 귀여운 외모라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글쎄, 사랑의 힘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이가 오애순이한테 50년 동안 계속 사다 줘서 서랍 안에 가득 쌓인 머리핀처럼, 남편은 나에게 끊임없이 '귀엽다. 예쁘다.' 말하며 내 삶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아마 남편이 곁에 없다면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그 개구진 눈빛이 가장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
힘든 날은 있었지만 단 하루도 외로운 날은 없었다는 애순이처럼, 나 또한 남편과 살면서 힘들고 무너지는 날은 많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외로운 날은 없었다. 살면서 늘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듯 공허했는데 남편을 만나고 12년이 지난 지금, 어린 시절부터 고질병이었던 가슴 시린 증상은 사라졌다.
눈 감는 날 남편과 함께 한 날들을 떠올리며 더할 나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삶에는 아쉬움이 남을지 몰라도 남편과 함께 했던 날들에는 아쉬움이 없으리라. 내 삶에 남는 아쉬움은 내가 게을렀던 탓이며 용기가 부족했던 탓이다. 남편 탓할 건 아무것도 없다.
유리몸이라 불릴 만큼 뼈도 잘 부러지고 부실하지만 크던 작던 나에게 잠시라도 짐 지우지 않으려 하고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나를 위해 자기 몸 불사르며 산다. 그런 그를 어찌 나약하다 탓할 수 있겠는가.
공부 안 하는 선비, 다시 말해 '한량'이 체질인 사람이지만 돈 벌어서 나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종일 고군분투하며 산다. 일이 뜻대로 안 풀려도 포기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든다. 그런 그를 어찌 무능력하다 탓할 수 있겠는가.
관식이는 애순이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인다. 외로운 애순이 인생에 꺼지지 않는 촛불 같은 한 사람. 그 한 사람의 존재가 애순이를 살게 한다. 너는 뭐든 잘한다고, 너는 무조건 잘한다고 응원해 주고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살 수 있다. 남편은 나에게 그런 단 한 사람이다.
하지만 남편에게 관식이 같은 묵묵함과 듬직함은 없다. 산책하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면 남편은 나무 스틱으로 인도 옆 울타리를 훑으며 걷는다. 울타리를 실로폰 삼아 연주하기도 한다. "으이그~~~ 내가 그거 하지 말랬지! 나이가 몇 개야. 마흔이 넘어서도 왜 그러는 거야." 등짝을 후려치며 남편을 타박하면서도 내 얼굴은 웃고 있다. 웃지 않으면 어떡하겠는가.
"웃는 거 봐. 행복해서 죽네 우리 여보."
"내가 행복해서 웃는 것처럼 보여? 좋아서 웃는 거랑 어이없어서 웃는 거랑 구분하라고 했지!"
결혼하고 웃음이 늘었다. 행복해서 웃는다기 보다는 코웃음이나 너털웃음에 가깝지만, 진짜 행복해서 웃든 울 수 없어서 웃든 어쨌든 웃는 건 웃는 거다. 양관식이 같은 든든함은 없지만 유머감각은 양관식이보다 100배쯤 되니 퉁쳐주기로 한다.
양관식이는 오애순이의 3가지 소원인 '육지 가기, 대학 가기, 시인되기' 중 어떤 것도 이뤄주지 못한 것 같아 가슴 아파한다. 남편도 똑같다. 어제는 조금 슬픈 눈동자로 남편이 말했다. "나는 대체 여보한테 해준 게 뭐지?"
글쎄, 특별히 떠오르는 건 없다. 사랑, 오직 사랑뿐이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따뜻한 손길 오직 그뿐이다. '그뿐'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귀하다. 내가 평생 바랐던 것들이니까. 계산 없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웃으면서 살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이다.
"00 앞에서 만나."
남편과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기 위해 걷다 보면 저 멀리서 익숙한 생명체가 보인다. 서로의 이목구비가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이지만 이미 서로의 존재를 인지했음이 느껴진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겨지지도 않는 몸뚱이를 나무 뒤에 숨긴다. 남들 보기에 싱겁고 우스꽝스러운 숨바꼭질 놀이를 마치고 상봉한 우리는 또 이유 없이 웃는다. 아침에 만나도 점심때 만나면 반갑고 저녁때 만나면 또 반갑다. 이 세상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반갑고 기쁘다.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을까.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까. 나에게 주어진 삶을 미련 없이 마음껏 살고 싶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다. 야망도 열망도 많은 나이기에 앞으로도 허투루 살지는 않을 테지만 막막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 하는 삶은 지금 이대로도 더할 나위 없다. 삶의 끝에 망설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천의 생을 반복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라.
사랑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_<입보리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