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키비키 결혼생활
토요일 아침, 그의 흥겨운 노랫소리에 잠에서 깬다. 문을 열고 나가니 남편이 일찌감치 샤워를 마치고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여보 일찍 일어났네?"
"주말이잖아~ 놀러 가야지~"
"그럼 나도 얼른 씻을게."
잠시 후,
"여보 나도 준비 끝! 근데 우리 어디가?"
남편은 계획을 세우지 않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상황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성향이 적다.
그런 면에서 남편은 최고의 여행메이트다.
01
남편은 짐에 대한 계획도 없다.
어딜 가든 늘 팬티 몇 장, 양말 몇 켤레, 티셔츠 한 두장, 바지 한 개 정도면 끝이다. "여보 칫솔은 안 챙겨?" 물으면 그제야 "아 맞다!" 하며 물 묻은 칫솔을 달랑 가져다가 슬쩍 가방에 넣는다. 작년 발리 여행에서도 대부분의 옷을 현지에서 몇 천 원씩 주고 사 입었다.
짐이 없는 남편 덕분에 텅텅 빈 캐리어는 미래의 쇼핑 공간으로 활용한다. 내가 캐리어 사이즈 때문에 쇼핑을 주저하면 한결같이 큰소리친다. "여보 그냥 사! 내가 어떻게든 캐리어에 다 넣어줄게. 내가 무조건 집까지 가지고 가 줄게!"
02
남편은 새로운 걸 경험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여보 여기 강 래프팅이 엄청 스릴 있대."
"콜!"
"여보 새벽 3시에 출발하는 일출 트레킹이 있대."
"콜!"
"여보 현지 가이드랑 정글탐험하는 게 있다네."
"콜!"
직접 여행 스케줄을 알아보지는 않지만, 내가 무엇을 제안하든 남편은 무조건 '콜'이다.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에게는 최고의 여행메이트다.
03
남편은 음식과 숙소에 대한 호불호도 없다.
덕분에 우리는 주로 현지 사람들만 아는 식당을 찾아다니며 더 날 것에 가까운 현지음식과 문화를 즐긴다. 무던한 성향 덕분인지 무얼 먹든 어디에서 자든 한 번도 탈이 난 적이 없다. 그는 내가 선택한 숙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물론 나의 검색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편이지만,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으니 한 번쯤 불만이 있을 법도 한데 남편은 어딜 가든 금방 적응하고 그 장소에 자기를 맞춘다.
그는 올챙이 알이 있는 발리 우붓의 수영장에서도 수영을 즐긴다.
04
남편은 여행지에서 운전하는 걸 즐긴다.
여행하며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캐나다에서는 밴쿠버부터 캘거리까지 자동차 여행을 했고 발리는 갈 때마다 오토바이로 여행했다. 남편은 낯선 여행지에서의 자동차 운전도, 복잡한 현지 골목에서의 오토바이 운전에도 망설임이 없다. 남편 덕분에 교통수단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여행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보물 같은 장소를 발견하기도 한다.
또 남편은 길눈도 밝아서 몇 번 왔다 갔다 해보면 금방 네비 없이도 다닌다. 오늘의 여행계획을 미리 말해줄 필요도 없이 오토바이에 탄 후, "어디로 모실까요?" 묻는 남편에게 목적지만 말해주면 끝이다. 나는 길치여서 네비 없이는 아무 데도 찾아다니지 못하는데 환상의 여행짝꿍이다.
05
여행할 때 남편에게는 딱 한 가지 계획이 있다.
남편의 유일한 계획은 '서윤이와 행복한 여행하기'이다. 내가 느지막이 일어나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혹시 필요할지 모르는 모자나 긴 옷, 선글라스 등을 가방에 챙겨둔다. 여행에 대한 계획이 없을 뿐, 여행 내내 늘 나의 안위를 가장 먼저 살핀다. 내가 늦잠을 자면 남편은 계획도 없이 목적도 없이 일단 밖으로 나가 동네 구석구석을 거닌다. 그러다가 우연히 커피가 맛있는 카페를 발견하기도 하고, 내가 관심 가질만한 요가원을 찾아오기도 한다. 눈 뜨자마자 마시라며 갓 착즙 한 신선한 채소주스를 사 오기도 한다.
여행은 대체로 늘 좋지만, 낯선 곳에 나를 던지는 일이기에 은근히 몸과 마음이 긴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 여행할 때면 걱정 없이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어디를 가도 무얼 해도 마음이 편안하다. 남편 덕분에 나 혼자 여행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다채로운 에피소드가 쌓인다. 덕분에 글감도 풍성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없는 것만큼 인생에 대한 프레임도 없이 살아가는 남편과 살면서 망망대해 위 종이배에 탄 것처럼 불안하기도 했다. 모든 인생계획, 이사계획, 여행계획을 나 혼자 세우다 보니 지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애초에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오히려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나폴레온 힐의 말처럼 '우리는 내 운명의 지배자이며 내 영혼의 선장이다.' 인생이라는 항해의 선장은 자기 자신이기에, 핸들을 꼭 잡고 방향을 잘 잡고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항해는 일정한 항로를 그대로 따라가야 하는 '시험'이 아니라 다이나믹한 '모험'이다. 항해의 목적은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항해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내 영혼의 선장으로써 성장하고 자기를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남편과 한 배를 타고 가는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안개 낀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처럼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잔잔한 날도 있고 폭풍 치는 날도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남편과 함께 하는 항해가 즐거울 거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함께 하는 항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플랜 A 보다 플랜 B가 더 좋을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더 좋다.
플랜 A는 나의 계획이고,
플랜 B는 신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_류시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캐나다에 갔을 때 렌터카를 타고 신나게 도로를 주행하는데 뒤에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왔다. '우리는 아니겠지.' 했는데 우리가 맞았다. 암행경찰에 걸린 것. 영문을 모르는 우리는 차를 세웠고 운전석에 앉아있던 남편은 조용히 창문을 내렸다.
"너네 왜 차를 안 세워? 소리 못 들었어?"
"우리 쫓아오는 건 줄 몰랐어."
"너네 과속이야. 벌금티켓 끊어줄게."
"우리가 과속했어? 몇 킬로로 달렸는데?"
"180km"
"응?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실랑이하고 싶은 생각 없어. 이건 협상이 아니야."
"아니, 하나만 확실히 말해줘. 180km라고?"
"118km!"
"아 오케이."
내가 남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화하는 동안 내 시야에 남편은 없었다. 남편은 마치 자동차 시트와 한 몸이 된 것처럼 좌석에 온몸을 딱 붙이고 입을 앙 다물고는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 뭐야? 아주 없는 사람 같더라?"
"나는 몰라. 아무것도 몰라.... 외국에서는 경찰 만나면 꼼짝하지 말라고 했어."
몇 개월 후 30만 원 넘는 벌금을 냈고, 경찰 앞에서 아내를 총알받이로 내세웠던 남편의 비굴함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아이패드 펜슬 고장으로 그림이 최소화되었습니다. 너른 이해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