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텔라윤 Jul 03. 2024

두려움과 맞짱 뜨기

두려움 너 나와!


퇴사도 했고, '내 안의 나'와 재회도 했으니 이제 꿈을 향해 뛰어나가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누가 자꾸 발을 걸어 넘어 뜨린다.


"뭐야? 누구야?"

"나야. 두려움."


"뭐야? 이번에는 또 누구야?"

"나야. 자기 불신."


너 뭐 돼? (출처. Unsplash)


마음 같아서는 다 준비가 된 것 같은데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계획을 세우고 의지를 다져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꾸 같은 말이 떠오른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나조차 나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명상으로 몸과 마음에 붙어있던 군더더기를 떼어내고 나니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하지만 껍데기를 한 겹 벗겨내고 나니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드러났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를 먼저 치유하기로 했다. 내 몸과 마음이 온전해야 무엇을 하든 올바르게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모닝페이지


내 안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감정을 꺼내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건 '모닝페이지'이다.




모닝페이지는 책 <아티스트 웨이>에 나오는, '자기 검열을 떨쳐내고 창조성을 깨우기 위한 도구'이다.

-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노트 3페이지를 다 채울 때까지 손으로 글을 쓴다.
- 눈 뜨자마다 쓰는 이유는 아침 첫 40분이 '무의식'이 가장 깨어있는 시간이기 때문이고,
- 노트 3페이지를 채우는 건 3페이지를 써야 '검열 없는 진짜 속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모닝페이지는 '혼자 하는 글쓰기'로 누군가에게 공유하는 글이 아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한 연습으로서의 글쓰기도 아니다. 검열 없이 마음껏 쓰는 게 가장 중요하다.


(출처. Unsplash)



12주 동안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비몽사몽 노트 앞에 앉아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다. 내가 썼다기보다는 쏟아지는 말들을 손을 움직여 받아 적기만 했다. 쓰다 보니 나조차 모르고 있던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깊이 묻어 둔 과거의 상처, 트라우마, 어린 시절 경험, 친구와의 대화, 열망, 야망, 꿈, 혼란 등등....


꼭꼭 숨겨져 있던 부정적인 감정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두려움 수치심 자격지심 피해의식 질투 서러움 경쟁심 낮은 자존감 고집 적대감 슬픔 죄책감 자기 불신 애정결핍 불안. 이제 끝인가 싶으면 또 나온다. 그중 나를 괴롭게 하는 주요한 감정은 '두려움과 불신'이었다.


'내가 살아가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 불신이다. 나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을 깨고 앞으로 나아감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이다.'

2017.10.15. 모닝페이지.


나의 두려움의 정체를 깊숙이 들여다보니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소속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거절당할 것 같은 두려움,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그리하여 결국은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회사에서든 언제나 '쓸모'를 증명해야 인정받았다. 도움이 되고 쓸모가 있는 존재여야 사랑받고 존재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쓸모의 굴레'에서 살아왔기에 '나는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온전한 존재이다.'라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은 결국 '자기 불신'이 되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어떤 쓸모 있는 지식과 역량을 채워 넣어도 소용이 없었다.


두려움과 자기 불신은 '완벽주의'로 이어졌다.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해내서 인정받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완벽'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했기에,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면서도 불안했다. 완벽주의는 나를 더욱 불완전하게 만들 뿐이었다.


모닝페이지를 쓰면서 두려움, 자기 불신, 완벽주의의 악순환을 발견했다. 늘 나를 따라다니던 '어떻게 하면 나를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도 이 악순환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셀프 치유 글쓰기

(출처. Unsplash)


내 안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농도는 옅어졌다. 숨기려 하지 않고 글로 꺼내어 쓰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렇구나'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물론 감정을 꺼내어 쓴다고 해서 당장 그 감정이 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더욱 도드라지는 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손을 움직여 감정을 쏟아내고, 내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치유효과가 있었다. 깊은 속마음을 꺼내어 들어주고 보듬어주고 흘려보내는 작업을 하며 내가 나에게 상담사 역할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12주의 여정을 마치고 보니 모닝페이지는 '셀프 치유 글쓰기'였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쓰는 건 그 자체로도 치유효과가 있다. 게다가 손으로 쓰는 글쓰기, 검열없는 무의식 글쓰기인 모닝페이지는 그 치유효과가 더 확실했다.


12주 후 생각지도 않게 생리가 규칙적으로 돌아왔다. 확실한 치유의 증거였다. 생리는 감정과도 연결되어 있다. 물리적으로는 몸의 배출과 정화기능과 연관이 있다. 혈액이든 배설물이든 배출이 잘 되어야 흐르는 물처럼 유연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배출이 막히면 마음에도 두려움이 쌓인다. 손에 연필을 쥐고 고인 감정을 노트에 쏟아내면서 막혀있던 흐름이 뚫렸는지, 초경부터 불규칙했던 생리가 처음으로 규칙적인 주기를 되찾았다.


매일 아침 1시간동안 무의식을 쏟아내고 나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걸 느낄 수 있다.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아침을 시작하니 하루가 산뜻하다. 그렇게 12주를 보내고 나니 몸과 마음이 정화된 듯 가뿐했다.




두려움과 맞짱 뜨기


물론 두려움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말자. 나를 믿자.'라고 되뇔수록 나의 두려움을 눈치챈 두려움은 더 힘을 얻기도 했다. 두려움을 경계하고 두려움에 집중할수록, 기세등등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어느 날 하루는 두려움과 맞짱을 뜨기로 결심했다.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 두려움이라는 존재를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서 '두려움'을 불러냈다.


"두려움, 너 나와. 어디에 숨어서 쓸모니 자기 불신이니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도저히 이렇게는 못살아. 내 인생 너 때문에 망칠 순 없어. 나와. 오늘 단판을 짓자고."


"......."


아무리 기다려도 두려움은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깨달았다. 두려움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두려움은 결코 나의 삶을 해칠 수 없다는 사실을.


뭐야.. 너야..? (출처. Unsplash)



깨달음과 동시에 두려움은 힘을 잃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덮칠 듯 내 삶에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던 두려움은 기별도 없이 존재를 감추었다. 두려움이 내 안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을 준 건 나 자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허락 없이는 내 안에 두려움이 자리 잡을 수 없다.


'두려움 없는 완벽한 나'를 추구하다가 실패했다. '때로는 두려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나'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야 나는 나로서 온전해졌다. 그제야 불완전한 나와도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두려움 or 사랑


모닝페이지를 쓸 때 첫 문장은 대부분 부정적인 말로 시작한다.


'오늘도 늦잠을 잤다. 나는 역시 안 되는 건가. 악몽을 꿨다. 잠을 설쳤다. 피곤하다....'


하지만 세 번째 페이지를 다 채울 무렵에는 어김없이 좋은 마음이 쏟아져 나온다. 사랑, 희망, 믿음, 존중, 겸손, 연민 등 반짝이는 것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운다. 12주 동안 매일 아침 내 안에서 흘러나온 좋은 마음을 받아 적으면서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안에는 이미 좋은 것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어두운 감정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 안은 온통 빛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두려움에 가려져있던 사랑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빛나는 마음을 가득 품고 있는 나를 믿고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부터 나의 기본 세팅 상태가 사랑이었다면, 두려움도 사랑도 몰랐을지도 모른다. 깊은 두려움 덕분에 그 반대편에 있는 깊은 사랑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나는 사랑이다. 내 안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우리 세대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 자세를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_윌리엄 제임스



MORE LOVE _ LESS FEAR (출처. Unsplash)


여전히 내 안에는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때로는 두렵겠지만,

나는 언제나 사랑을 선택하고 싶다.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체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I'm enough. You're enough.


.

.

.

.

.





<쿠키 글>

내 안의 지혜와 연결되기


사람들이 왜 모닝페이지를 써야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다른 한쪽 면에 이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모닝 페이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부정적인 사고의 다른 면으로 우리를 이끈다. 검열관의 간섭이 닿지 않는 곳으로 말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한때는 분명히 자신의 것이었던 평온하고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_<아티스트웨이> 줄리아 카메론


모닝페이지를 쓰면서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어떤 삶을 살고 싶어? 네가 진짜로 기쁜 순간은 언제야? 너에게는 어떤 가치가 중요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는 뭘까?'


인생에는 명쾌한 정답이 없는 문제들이 있다. 그 불확실성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나에게 믿음이 없으면 인생의 정답을 밖에서만 찾으려고 헤매게 된다. 물론 부모님이나 멘토, 친구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나의 삶'이고, 나의 삶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누군가를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 또한 과거에는 늘 답을 밖에서 구하고자 했다. 나보다 성공한 삶을 사는 듯 보이는 사람에게 묻곤 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허공에 대고 질문을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책과 강의, 타인을 통해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 힌트를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결국 나에게로 돌아와 내 안의 나에게 물어야 한다. 내 안의 지혜로운 나와 연결되어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전 03화 당신, 지금 어디에 있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