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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세준 Apr 17. 2021

젠더라는 벽

명상 시작하면 중간에 만나는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젠더'다.


젠더 어려운거 아니고,


'난 남잔데...'

'난 여잔데...'


이게 젠더다.


스스로를 남자 혹은 여자라고 규정짓고 그 촘촘히 짜인 스크립트 따라 행동하는거.


젠더 역시 의식을 제약하는 숱한 조건화된 프로그램 중 하나고, '정상적인' 의식의 발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용해되는 이슈 중 하나다.


지금 세상이 시끄러운게 다 사람들 의식이 상승하느라 그런 거다.


전에는 스스로 남자니까... 여자니까... 하고 참고 견뎠던 것들 이제 못참고 못견디겠다고 하니 시끄러운 거다.


자연스러운 흐름이고 바람직한 갈등이다.


남자

여자

지겹지도 않나?


그 짐 내려 놓을 때가 되었다.


나는 남자라서...

나는 여자라서...


이거 내려놓으면 일단 명상가로 인정이다.


그거 쉬운거 아니다.


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양극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 기간이 길수록

신체적 심리적 정서적 영적으로 안 좋다.


당신의 젠더는 당신을 병들게 만든다.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그렇다.


명상=탈조건화


하나하나 다 해체하자.


남는게 없을때까지.


심지어 내가 인간이라는 '상'조차 없을 때까지.


그 정도하면 이제 비로소 페미니즘도 안티-페미니즘도 그냥 사람이 내는 목소리임이 들린다.


그게 각자 나름의 고통에서 나온 이야기라는게 들린다.


사람들이 싸우는건 들을 귀가 없어서다.

도울 손이 없고,

볼 눈이 없어서 그렇다.


멈춰야 비로소 들리고 보이고 도울 수 있다.


젠더라는 '상'을 멈춰야 한다.


하지만 주의하자.


명상가는 오히려 더 클리어하게 사안을 분별한다.


결코 뭉게지 않는다.


안티페미니즘이랑 페미니즘은 동급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전지구적인 차원의 에너지 밸런스패치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분명 시대정신과 맞닿아있고 그 원천에는 젠더로 분열되어 온갖 갈등과 고통을 자가발전 중인 인간 의식을 다시 재통합시키려는 높은 차원의 복원력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요즘 태어나는 애들일수록 전통적인 젠더롤을 거부하는 성향이 짙다).


빈면, 안티-페미니즘은 일종의 반동이고 그 자체의 동력이 없으며 페미니즘으로 상징되는 복원력이 지닌 속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페미니즘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도구로 쓰일뿐 그 자체로 절대진리도 아니고 최종 목표는 더더욱 아니다.


당신이 생과 생을 건너온 여행자이자 멀티플레이어임을 자각하는 그날,


성별은 그저,  

우리가 고르는 하나의 악기,

영이, 신이, 의식이 그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수단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우와 열이 없음이 자명해진다.


오히려 둘의 하모니가 한층 더 이 창조계를 아름답고 온전하게 만들고 있음을 깨달으면 자신이 택한 성별을 긍정하게 된다.


굳이 전생까지 안가도 된다.


지금 내 곁의 연인, 부모, 배우자, 자식, 친구, 동료가 젠더라는 틀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만 보아도 충분히 당신은 깨달을 수 있다.


그 생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해보라.


여자로 태어나 커가면서 겪는 온갖 공포와 두려움,

남자로 태어나 끊임없이 힘이나 성취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거대한 강박,


그 모든 것이 나이고 내 일이라고 생각해보자.


명상가는 그렇게 첫걸음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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