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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Sep 18. 2020

남편을 믿지 않겠다고 결심한 엄마

아들의 대학교 등록 마감시간을 놓치고 눈물 흘리며 되돌아와야 했던 엄마

저의 큰오빠는 올해로 77세입니다. 큰언니와는 3살 터울이지요. 큰오빠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고향에서 100여 리 떨어진 전주로 기차 통학을 하며 다녔습니다. 오빠는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친했던 친구와 함께 서울대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친구는 합격을 했고 오빠는 낙방을 했습니다. 오빠는 합격을 한 친구보다 실력이 부족하다고 믿지 않았기에 재수를 하여 서울대학교에 한번 더 도전을 했지만 또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큰오빠는 후기대학으로 인천에 있는 인하대학교 공대에 지원을 해서 합격을 했습니다. 엄마의 말씀에 의하면 그 당시(1965년)에 인하대학교 공대도 서울대학교 공대만큼 들어가기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엄마는 오빠가 큰아들이기 때문에 농협에 근무하고 있는 아버지께서 큰언니와는 다르게 등록금을 마련해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등록 마감일이 이틀 후(모레)인데도 아버지는 등록금 준비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말도 없더랍니다.


그때서야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엄마는 여기저기를 급하게 쫓아다니며 등록 마감일 하루 전에 큰아들의 등록금을 마련했습니다. 다음 날 등록 마감일에 엄마는 준비한 등록금을 전대에 넣어 허리에 차고 그때 당시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저를 등에 업고 인천으로 향했습니다.


요즘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도 않았던 1965년. 고향 오수에서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고 또 버스로 갈아타고, 어린 저까지 둘러업고 인천에 있는 인하대학교로 마음을 졸이며 부랴 부랴 달려갔을 엄마의 절박한 마음이 지금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대학교에서는 이미 등록 마감시간 30분이 지났다고 오빠의 등록을 받아 주지 않더랍니다. 엄마가 아무리 통사정을 해도 끝끝내 안된다는 말에 엄마는 힘없이 돌아서야 했습니다.
그 시절 등록하지 못한 빈자리에는 돈이 많은 집의 자녀가 적지 않은 기부금을 납부하고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등록 마감시간 전에 도착하기 위해서 어린 저를 등에 업고 정신없이 달려갔던 그 먼길을 허탈한 마음으로 뒤돌아 오면서 엄마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통한의 눈물을 뿌리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자식 교육에 있어서 절대로 아버지를 믿지 않겠다고요. 그리고 대학교 입학금은 빚을 내어서라도 일찌감치 장만하여 두 번 다시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요.


그렇게 대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큰오빠는 엄마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그 후로 엄마는 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안타깝게 놓쳐 버린 큰오빠의 대학 입학을 한숨으로 토하고는 했습니다.


"아마 큰오빠가 그때 대학을 갔더라면 지금보다 오빠의 형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라고요.


그 후에 큰오빠는 군대에 입대를 했습니다. 오빠가 군대에서 휴가를 나올 때 우리 집 탱자나무 울타리 밑에서 놀고 있는 저를 발견이라도 하면 오빠는 저를 번쩍 안아 들어 올려 목마를 태우고 성큼성큼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서곤 했다고 합니다.


오빠가 군대를 제대한 후 집 앞 빈터에 양계장을 지어 놓고 닭들을 사육하던 일, 우리 집 토방에 벌통들을 세워 놓고 양봉을 하던 일이 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어린 저는 햇살이 따뜻한 봄날이면 벌통 앞 마당에 앉아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면서 놀기도 했는데, 자주 벌에 쏘인 탓에 얼굴 곳곳이 부어 있기도 했습니다.


유난히 꽃을 가꾸기를 좋아했던 오빠 덕분에 비록 시골이긴 했지만 우리 집 꽃밭은 도시의 웬만큼 사는 집의 정원처럼 규모도 컸고 다양한 종류의 장미꽃들과 많은 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집안 곳곳에 과일나무도 종류가 다양하게 많았지요. 배나무,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포도나무, 매실나무, 밤나무, 산수유나무, 배롱나무 등. 봄이면 우리 집은 온통 과일나무의 꽃들로 둘러 쌓여 있어서 지금도 저는 우리들이 태어나고 자라던 고향집의 풍경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오빠가 서독으로 광부 생활을 하러 떠났습니다. 오빠는 3년 동안 서독에서 광부 생활을 하며 번 돈을 엄마에게 보내 주어 밑의 동생들이 학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오빠가 서독에서 보내 준 돈이 없었다면 다른 오빠나 언니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했을 거라고요. 정작 본인은 그렇게 가고 싶었던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했지만 낯선 외국에서 온 몸으로 벌어 들인 돈으로 동생들의 학비를 대 주었던 큰오빠였습니다.


큰오빠는 한 번도 남동생들이나 여동생들이 대학교에 간다고 싫어하거나 배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1982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야간대학에 합격을 하여 등록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저에게 큰언니는 전화를 걸어 대학을 뭐하러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집안 형편도 어려운데 고등학교 졸업을 했으면 됐지 않느냐고요. 그냥 취직을 해서 집안에 보탬도 주고 네가 벌어 결혼자금도 스스로 준비하여 결혼이나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당시 언니 오빠들이 십시일반으로 마련하여 준 등록금이 준비되어 있어서 이제 등록을 하러 가는 일만 남아 있던 저에게 큰언니의 전화는 서운한 마음도 들게 했고 대학 등록을 포기하려는 마음을 생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학교 등록을 포기하려고 마음을 먹으니까 왜 그리도 마음이 서운하고 아프던지요. 안양에서 결혼하지 않은 아들 딸들만 모여 자취하던 집에서 모두들 출근하고 저만 안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던 낮시간에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외판원들 외에는 올 사람도 없는데 누구일까.. 하고 현관문을 열었더니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들렀다며 큰오빠가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너무도 서럽게 울었던 탓에 두 눈이 퉁퉁 부어 있는 저를 보고 큰오빠는 무슨 일이 있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등록을 포기하려고 한다는 저에 말에 오빠는 크게 화를 내며 나무랐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요. 대학교에 등록을 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요. 아무리 누나(큰언니)가 뭐라고 해도 너의 인생이니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요. 행여 또 누나가 뭐라고 해도 오빠가 알아서 하겠으니 꼭 등록을 해야 한다고 저를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그때 마음을 고쳐 먹고 대학교에 등록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큰오빠는 재수를 하면서 대학교에 합격을 하고서도 등록 마감 시간이 30분 늦었다고 등록을 하지 못해서 끝내 대학을 갈 수 없었지만, 저의 대학 등록을 마치 자신의 일인 듯 저의 등을 떠밀어서 하도록 했습니다. 어쩌면 그때 그 시간에 큰오빠의 예상치 못했던 방문이 없었더라면 저는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큰오빠가 서독에 있을 때, 우리 형제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앉아 마치 군인 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쓰듯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무슨 연례행사처럼 낯선 곳에 홀로 있는 큰오빠를 그리워하며 쓰던 편지. 외국으로 보내는 봉함되는 항공 봉투.


큰오빠에게서 답장이라도 도착하는 날이면 모두들 얼마나 반가워들 했는지 모릅니다. 오빠는 여백이 그리 많지 않은 봉함되는 편지지에 행여나 한 사람이라도 빠뜨릴세라 엄마부터 열두째 막내에게까지 일일이 편지를 썼습니다.


좀 더 많은 내용의 편지를 쓰기 위해 깨알 같은 글씨로 많은 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면서 몇 줄의 글이라도 더 쓰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큰오빠가 제 이름을 불러주며 써 주었던 몇 줄의 글. 다른 사람들에게 썼던 내용이야 나 몰라라 하고 나를 잊지 않고 써 내려 간 글들만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큰오빠가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재수를 하고 있던 그 시기에 엄마는 저를 낳으시고 큰오빠에게 저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비록 여자로 태어났지만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 대한민국에 이름 크게 떨치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 시절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큰오빠는 저의 이름을 밝을 명(明) 비단 라(羅) '명라'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큰오빠는 1987년 월간 <예술계>에서 신인상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신 시인입니다. 1990년에는 '올리브 숲 속의 비둘기'라는 시집을 문학세계사에서 출판하여 1990년 5월 19일 오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옆에 있는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출판기념회도 가졌습니다.


오빠는 처음에는 서독에서 광부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일을 여러 편의 시로 써서 시집 제목을  '광부 일기'로 하려고 했는데, 제가 강력하게 주장을 해서 '올리브 숲 속의 비둘기'로 했습니다. 오빠가 서독에 있을 때,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면서 우리 열두 남매의 우애를 생각하면서 썼다는 시가 바로 '올리브 숲 속의 비둘기'였습니다.


큰오빠의 시 '올리브 숲 속의 비둘기'를 소개합니다.




       올리브 숲 속의 비둘기

                                                                                  - 한 풍 작


     올리브 숲 속에 살고 있는

     비둘기의 가슴은

     빛나는 초록일까


     그 향기를 쪼아 먹고

     구구 울며

     조그마한 정적이나 두드리고 있을까


     바닷가로 함께 날던

     갈매기를 생각하고 있을까


     자욱한 안갯속에서도

     다가오는 미래를 가늠하고

     태양의 거리에서

     돌아옴을 위해

     떠남을 기다리고 있을까


     달빛 아래서

     영혼의 그림자를 만들어

     남몰래 피어나는

     구름 같은 꿈을 키우고 있을까


     올리브 숲 속의 비둘기는

     오누이 말고도

     누구랑 누구와 행복을 뿌리며

     다정히 살고 있을까.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큰 오빠의 군대입대하기 직전의 사진


위의 사진은 저의 가장 어릴 적의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큰오빠의 군입대를 기념하기 위해서 저의 가족이 꽃밭 앞에 서 있고 할머니와 엄마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아직 돌이 안된 어린 제가 엄마 품에 안겨 무릎에 앉아 있는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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