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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Sep 17. 2020

친정집 논을 팔아 딸의 약국을 차려 준 엄마

1965년, 24살 딸에게 약국을 차려 준 친정엄마

큰언니는 지금도 만나면 대학교를 다니면서 고생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오랫동안 기억의 저편에 저장해 두었다가 쉼 없이 이야기를 하고는 합니다. 없는 살림에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공부밖에 할 수 없었던 이야기. 또 엄마 대신 줄줄이 사탕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도 언니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겠지요.


어찌 되었건 큰언니는 4년 동안의 대학교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처음에는 보건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언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언니는 약국 운영보다도 보건소에 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으로 느껴집니다.


언니는 보건소에서 첫 월급으로 9,400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쌀 한가마니가 2,500원이었고, 언니보다 먼저 보건소에 취직을 한 남자직원은 언니보다 나이도 많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탓인지 언니보다 월급이 적었다고 했습니다.


언니는 첫 월급을 받아서 하숙비도 남겨놓지 않고, 월급봉투 그대로 엄마에게 건네 주었다고했습니다. 엄마는 아버지로부터 단 한번도 월급봉투를 받지 못했는데, 큰딸의 첫 월급봉투를 받고나서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언니의 보건소 출근은 3개월만에 끝이 났습니다.  애초부터 엄마는 언니가 사범대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안되고 오로지 약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설득해서 친정집(외갓집) 논을 팔아서 큰언니에게 약국을 차려 주었습니다.


저에게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큰언니와 셋째 언니의 이야기에 의하면 외할아버지께서는 그 시절에 보통의 할아버지들보다 보기 드물게 외할머니의 의견을 무척 존중했다고 합니다. 언니들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다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외할머니가 하자는 대로 의견을 들어주셨고, 큰소리를 내어서 기분을 상하게 한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러셨기에 딸의 의견을 존중해서 당신의 논을 팔아서 외손녀의 약국을 차리는데 도움을 주셨을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큰언니는 1965년 24살 나이에 약국을 개업하여, 78세 되던 2018년 10월까지 54년 동안 약국을 운영했습니다.

 

스무 살 시절의 엄마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젊은 나이의 엄마..


큰언니의 약국은 고향 오수에서 제법 거리(50여 km 정도)가 떨어진 장수군 장계면 시내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엄마께서 왜 그렇게 거리가 먼 곳에다 언니의 약국을 차려 주었는지는 저는 단 한 번도 묻지 않았지만(장수군이 엄마의 외갓집 동네이기도 했습니다) 장계면에서 나름 번화한 장소의 3층짜리 건물 1층에는 언니의 약국이, 2층에는 다방, 3층에는 당구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그곳에서 언니는 처녀 약사로 불렸습니다. 처음에는 저의 바로 위 막내 오빠와 나로 하여금 애엄마가 아닌가... 하는 오해도 있었지만, 그런 오해는 금방 풀어졌다고 했습니다.


큰언니가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23살 때 태어난 저는 지금도 큰언니의 약국의 풍경과 그 근처의 풍경들이 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언니가 잠을 자고 일상생활을 했던 살림집은 약국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바로 위 오빠의 손을 잡고 약국과 집을 오고 가던 생각이 납니다. 큰언니는 약국을 운영해야 했기에 친척집의 사촌언니가 언니의 살림을 도와주었습니다.


약국과 살림집 사이에는 면사무소도 있었고, 성당도 있었고, 아이들 유치원도 있었습니다. 그 유치원 앞을 지나가면 아이들이 합창으로 불렀던 노래가 담 너머로 흘러나와서 자연스럽게 따라 부르고는 했습니다.


'보슬비에 얼굴이 간지럽다고 우리 집 앞뜰에 다일리아 고개 숙였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어린 저의 기억 속에 제법 규모가 큰 냇가가 있었는데, 어느 여름엔가 아주 큰 홍수가 나서 누런 황톳물이 출렁이는 냇물로 돼지가 떠내려가기도 하고 커다란 통나무가 둥둥 떠내려 가는 것을 둑에 올라서서 많은 사람들과 구경을 하던 생각도 납니다.


그리고 언니의 약국이 있는 상가에서 큰 불이 나서 저와 오빠의 생명이 위급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납니다. 2층에 있는 다방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는데 저와 오빠는 약국 안에 있는 작은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정신이 팔려 약국 방안에 어린 우리들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오빠가 나를 안고 큰소리로 우는 바람에 불을 끄던 소방관이 방안에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위험을 무릅쓰고 오빠와 나를 구조했다고 합니다. 훗날 그 소방관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고 표창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약국 건물에 불이 났을 때 외출 중이었던 큰언니는 불이 났다는 소식에 급하게 달려오느라 발목이 삐끗하는 바람에 하이힐 굽이 부러졌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두고 외상장부와 금고만을 겨우 챙겼다고 긴박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셋째 언니의 이야기에 의하면 처녀 약사의 소문이 나서 고향에서 아주 먼 곳에 떨어진 곳의 부잣집으로부터 보낸 중매쟁이들이 우리 집 대문을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중매쟁이도 그냥 중매쟁이가 아니고 갓을 쓰고 하얀 두루마기에 하얀 수염을 기른 점잖은 할아버지 중매쟁이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큰언니는 그 많은 부잣집의 며느리 되는 것을 모두 거절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냐고 묻는 저에게 셋째 언니는 엄마의 부탁처럼 큰언니는 줄줄이 딸린 11명의 동생들을 앞으로 보살펴 줘야 하는데, 우리 집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면 시댁의 눈치를 보느라 언니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부잣집을 모두 거절하고 큰언니에게 만만해 보이는 평범한 집안의 공무원이었던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훗날 1982년 제가 야간대학교에 합격을 하면서 언니, 오빠들의 도움으로 대학교 등록금을 준비할 때, 큰언니는 저에게 고등학교만 졸업을 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그냥 취직을 해서 돈을 모아서 결혼을 하라는 큰언니에게 엄마는 "너 대학교 보낼 때 모든 사람들이 없는 살림에 딸년 대학교 보낸다고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그런데 동생이 야간대학교를 간다고 하는데도 못 가게 하느냐? 친정집 논 팔아서 약국을 차려 준 돈을 이자를 쳐서 지금 당장에 다 갚아라"라고 하는 바람에 저는 그날 이후로 한동안 큰언니를 피해 다녀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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