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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명라 Sep 21. 2020

"딸들아, 너희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

남편이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멋대로 살면 이혼하라던 엄마..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서 평생을 못 배웠다고, 무식하다고 말을 들어야 했던 엄마는 일곱 명의 딸들에게 단 한 번도 너는 여자이니까, 딸이니까 학교에 다니지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부득이하게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우면 1년을 쉬게 하더라도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을 하게 했습니다.


남들보다 많은 열두 자식 모두를 때를 놓치지 않고 학교에 보내야 하다 보니 어떨 때는 마음속 이야기를 자신도 모르게 털어놓을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 가정 시간에 실기수업을 위한 수놓기 재료비를 타야 할 때 엄마는 '가만히 보면 딸들이 아들들보다 돈이 더 많이 들어간다고, 아들이면 안 들어가는 돈이 딸들은 쓸데없이 더 들어간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변함없이 언제나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배워야만 사회에 나가서 당당하게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결혼을 한 이후에도 자신의 일을 계속하라고 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경제적인 능력을 갖추어서 남편에게 예속된 삶을 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야만 남편에게도 시댁에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남편이 우리 아버지처럼 가정생활에 소홀하거나 자식들 교육에 등한시하거든 참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도저히 개선의 싹이 보이지 않으면 평생을 참고 살았던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언제든지 이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딸들이 좀 더 나은 조건의 남자를 만날 수 도 있는데, 결혼 후에 남편에게 더 당당하게 잘 살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다고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딸들이 남자에 대한 판단 기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와 비교하면서 결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만하면 우리 아버지보다 괜찮은 사람, 이만하면 우리 아버지보다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그럭저럭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고 길게 한숨을 내쉬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엄마의 그런 생각이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저의 언니들도, 그리고 저도 결혼을 하고 살면서 앞일을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일들에 부딪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남편에게 서운한 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는 합니다.


'나보다 몇 배나 많은 자식을 낳고도 아버지한테 무시당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엄마도 있는데... 이 정도는 내가 참아야지...' 하면서 문제를 삼기보다는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그냥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죠.


1984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형제들이 안양에서 살고 있던 때였습니다. 모든 식구들이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새벽녘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무슨 긴박한 일이기에 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했을까.. 하고 전화를 받았을 때, 결혼을 해서 돌이 안된 딸을 키우고 있는 다섯째 언니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습니다. 지금 자기 집으로 빨리 와 달라는 목소리였습니다. 엄마와 막내 오빠, 그리고 넷째 언니(다섯째 언니가 넷째 언니보다 먼저 결혼을 했습니다.)가 택시를 타고 다섯째 언니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엄마는 다섯째 언니와 돌이 안된 외손녀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다섯째 언니 집에 도착을 했는데 언니는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면서 서로 폭력을 주고 받은 상태였고, 언제 달려왔는지 언니의 시어머니, 손 아래 시누, 다른 시댁 식구들로부터 언니가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더랍니다.


시댁 식구들은 사돈인 엄마에게 이구동성으로 언니 결혼식 때 폐백음식이 부실했네, 언니가 시댁에 잘못한다는 둥 별별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엄마는 언니에게 대충 짐을 싸라고 하고 언니와 외손녀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언니를 통해서 전해 들었던 상황을 이러했습니다. 보다 나이가 5살 위인 다섯째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저와 같은 해인 1982년에 야간대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형부를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다섯째 형부는 위로 두 형이 있는데도 시댁의 일이라면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이 마치 큰아들인 것처럼 앞장서서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언니의 말에 의하면 두 형들도 다 잘 살고 있는데 자신이 번 돈은 언니에게 하나도 주지 않아서 언니가 번 돈으로 생활도 해야 하고, 언니가 직장에 출근하면 아이를 맡아 주는 할머니에게 주는 양육비도 언니가 100% 부담한다고 했습니다.


시댁 식구들도 맞벌이하는 언니네가 아주 부자인 줄 알고 돈이 들어가는 모든 일은 형부에게 의논을 하는 것에서 언니의 불만은 컸고, 그 과정에서 그날 몸싸움까지를 불사하고 부부싸움을 했는데 시댁 식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언니를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엄마에게 도와 달라고 전화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언니에게 든든한 직장도 있겠다 얼마든지 언니 혼자서 딸을 키우면서 살 수 있다고, 행여 다섯째 사위가 사과하지 않으면 이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다섯째 형부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형부가 사과를 하고 언니와 조카를 데리러 왔나 보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형부는 현관문 앞에서 신발조차 벗지도 않고 우리 식구들 얼굴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아이를 데리러 왔다고 했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아이이니까 데려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엄마가 앞으로 달려가더니 다섯째 사위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사위에게 큰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돌도 안된 딸이 걱정이 되어서 데리러 왔냐고, 나는 내 딸을 정성을 다해서 25년을 키웠다고, 나는 내 딸이 자네 딸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어디서 이따위 건방진 행동을 하냐고 하면서 다섯째 사위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습니다.


런 일이 있었던 이후로다섯째 언니와 형부는 이혼을 하지 않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더 낳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언제인가 엄마께서 살아계실 때 친정에서 만난 다섯째 형부의 말투나 얼굴 표정을 보면 그때 그 사건이 있었던 이후로 장모님에 대한 서운함이 계속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위에게 무조건 내 딸을 잘 봐달라고 사정하지 않고, 자네 딸보다 내 딸 나한테는 더 소중하다고 단호하게 말하면서 사위의 멱살을 잡고 흔들던 엄마의 당당한 모습이 지금도 저에게는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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