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남 7녀 열두 남매를 둔 무남독녀 외동딸을 위하는 마음에 외할머니는 외손주 외손녀들이 엄마의 품을 떠나도 될 때가 되면 외갓집으로 데리고 와서 여러 외손주 외손녀들을 사랑과 관심으로 키우시고 돌봐 주셨습니다.
저도 외갓집에서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가 7살이 되던 해에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외할머니 곁을 떠나 엄마와 언니 오빠들이 살고 있는 오수 고향집으로 왔지만, 다른 언니 오빠들 중에서는 외갓집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 오수의 집으로 온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국민학교를 입학하기 위해 오수의 집으로 오기 전에는 오로지 "내 강아지, 내 강아지..."하고 저만 챙겨 주시는 외할머니와 외갓집이 저의 가장 소중한 세계이고 우주였습니다.
외갓집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서 심으신 감나무들이 외갓집을 빙~ 둘러 울타리를 칠 정도로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먹감나무, 넙적 감나무, 장동 감나무, 고추처럼 뾰족한 고추 감나무, 단감나무..
그래서 우리 외갓집을 동네 사람들은 감나무집 특히 '단감나무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외갓집에 편지를 보낼 때에 편지봉투에 동네 이름만 적고 '단감나무집'이라고 쓰면 편지가 외갓집으로 제대로 배달되어 왔습니다.
지금은 그 많은 종류의 감나무들이 거의 다 베어지고 먹감나무 2그루밖에 없지만, 어린 시절의 저는 텃밭에 있는 먹감나무 가지에 새끼줄로 그네를 엮어 매달아 놓고 심심하면 그곳에서 그네를 타거나, 낡은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감나무 가지에 올라앉아 혼자서 선생님과 학생 역할을 번갈아 가면서 학교놀이를 하고 놀았지요.
그 시절 먹을 것도 별로 없었고 보리고개가 있던 그 시절. 외갓집의 단감나무는 동네 사람들 특히 젊은 총각들이 틈만 나면 호시탐탐 노리는 바람에 외할머니는 가을이면 단감나무 지키기에 각별한 신경을 쓰지 않으시면 안 되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맨날 검정고무신만 신던 제가 외할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조르고 졸라 예쁜 꽃신 한 켤레를 얻어 신게 되었습니다. 하얀 코빼기 고무신에 꽃무늬들이 알록달록 찍혀 있는 말 그대로 꽃신이었습니다.
그 꽃신이 행여 닳을세라 마루 한편에 올려놓고 애지중지 쓰다듬고 아끼며 신던 때, 여름 소나기가 한바탕 굵은 빗방울을 뿌리고 지나간 뒤, 해만 뜨면 한데 어울려 깨어진 그릇 조각들을 모아 소꿉장난을 하던 우리 개구쟁이들은 집 앞 냇가로 모여들었습니다.
시냇물은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붉은 빛깔의 황톳물로 넘실거리며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습니다. 그냥 냇가 둑에 서서 물구경만 해도 될 일을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냇물 가장자리에 발을 담그고 들어섰습니다.
저도 아끼는 꽃신을 신고 냇가로 들어섰지요. 한참을 냇가 가장자리에서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던 저는 그만 꽃신 한 짝을 냇물에 떠 내려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 붉은 황토물 속으로 떠 내려간 꽃신이 눈에 보일 리도 없었지만, 아직 어렸던 저는 그 꽃신이 냇물을 따라 자꾸자꾸 앞으로만 흘러간다는 생각으로 한 손에 나머지 꽃신을 꼭 움켜쥐고 울음소리를 내면서 냇물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달음박질을 쳤습니다.
꽃신을 떠내려 보냈다고 혼을 내실 외할머니의 얼굴도 떠 올랐고, 왠지 그 꽃신은 그렇게 떠 내려 보내서는 안 되는 저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꽃신이었거든요.
그 누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고 굽이쳐 흐르는 냇물을 따라 저는 앞으로 앞으로 달렸습니다. 그렇게 냇둑을 달리고, 줄 지어 서 있는 미루나무 밑을 겁도 없이 달려서 가끔씩 차들이 오고 가는 신작로를 건너자 외갓집 앞을 흐르는 냇물의 넓이보다 몇 배나 큰, 이제까지 제가 볼 수 없었던 아주 큰 규모의 냇가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앞에 펼쳐진 너무도 큰, 어린 저에게는 강물처럼 넓게 보이는 냇물을 굽이 쳐 도도하게 흐르는 붉은 황톳물을 바라보며 저는 더 이상 그 냇물 따라 앞으로 달릴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거리가 얼마만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외갓집을 너무도 멀리 떠나 와 있었고, 넓고도 넓은 그 냇물의 붉은 황톳물에서는 저의 꽃신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어린 저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 넓은 냇물은 흐르고 흘러 엄마와 언니 오빠들이 사는 오수의 우리 집 옆을 흐를 것이고, 용정리 밭을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냇가를 흘러갈 물이었지요.
한참을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고 망연자실 굽이 쳐 흐르는 넓은 냇물만 바라보다가 한 손에 꽃신을 움켜쥐고 힘없이 오던 길을 향하여 뒤돌아섰습니다.
오로지 꽃신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던 길, 너무도 멀리 와 버린 길.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시냇물을 따라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외갓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여름날의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외할머니에게 꽃신을 떠 내려 보냈다는 지청구를 듣고 한 짝만 남은 꽃신은 토방 한쪽에 놓여 있다가 가끔 아쉬워하며 저의 한쪽 발에 신겨지고는 했지요. 그렇게 한 짝만 남은 꽃신을 아쉬워하며 만지작 거리기를 여러 날, 저의 발에는 다시 낡은 검정고무신이 신겨졌습니다.
그리고 한 짝만 남은 꽃신도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어느 날, 저는 외갓집 앞 냇물 돌 틈 속에서 파랗게 이끼가 낀 꽃신 한 짝을 찾게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돌 틈을 뒤지며 가재도 잡고 다슬기도 잡다가 발견한 돌 틈에 끼어 있는 이끼가 잔뜩 낀 꽃신 한 짝.
냇물을 따라 흐르고 흘러 강물처럼 넓은 냇가에 이르렀을 것이고, 그리고 바다로 떠 내려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기억 속에서 애써 지워버린 아쉬움의 꽃신 한 짝. 그 꽃신 한 짝이 시냇물의 돌 틈 속에서 이끼가 낀 채로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절 저는 왜 꽃신이 냇물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만 흘러간다고 생각했을까요?
잃어버렸던 꽃신을 찾았을 때 이미 남아 있던 한 짝의 꽃신조차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리고 다시 찾은 그 기쁨의 의미도 퇴색해 버리고 말았지요. 이제는 더 이상 꽃신은 내게 있어 예전의 그 소중한 의미가 될 수는 없었지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시절 잃어버린 꽃신의 의미를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그것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바라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왔는데, 훗날 뒤돌아 보았을 때 그것은 여전히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앞만 보고 달려야 할 만큼 다른 것들을 다 포기해야 만큼 아직도 내게 있어 소중한 것들인가..,
정작 가장 소중한 그것은 지금 우리들 가장 가까운 곳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나 자신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것은 아닌지..,
혹시 떠내려 보냈다고, 다시는 찾을 수 없다고 못내 아쉬워하다가 정말 우연히, 어느 한 공간에서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있어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은 소중한 그것인지..,
그 시절의 소중했던 꽃신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그때의 꽃신과도 같은 의미로 소중한 그 무엇 지금 제게 있어 무엇일까요?
그 시절 꽃신의 의미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저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엄마 돌아가신 후, 신발장 속 신발들
* 위의 고무신 꽃신 배경사진 출처 : 구글, 이순주(@soonju.lee) • Instagram photos and vide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