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날들이 계속되면 왠지 게을러지고 무기력해지는 것 같다. 그럴 때면 나는 조건반사에 훈련된 동물처럼 어디론가 튕겨 나가려 한다. 그래서 또 짐을 챙겼다. 한겨울의 제주에서 7박 8일간의 일정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중순경 가족과 함께 며칠 머물 때는 바람이 많이 불고 내내 흐렸다. 텔레비전에 한라산의 설경이 비칠 때면 언젠가 한라산의 눈밭에 푹 빠져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곤 했다. 이번이 바로 그때였다.
도착 다음 날 애월읍의 숙소에서 녹고뫼 길이 포함된 고내, 장전, 소길, 유수암리 등 남북을 잇는 길을 시작으로 일 평균 20km 내외의 길을 걸었다. 해발 약 834m로 서부권에서 가장 높은 노꼬메 오름과 바리메 오름 등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오름을 위주로 걷고 한라산에서 이틀을 보냈다. 녹다 만 눈이 아이젠에 달라붙어 한 발에 3kg 정도의 모래주머니를 달고 다닌 듯한 날도 있었고, 저지 오름처럼 푹신푹신한 흙길을 편하게 걷는 날도 있었다.
1월 13일, 한라산에 대설특보가 내려 출입이 통제되었다. 다음날 방문한 한라산 둘레길 1코스 천아숲길은 우리만의 세상이었다. 한라대 목장 옆길로 들어서자 저 멀리 흰 눈에 덮인 한라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여쁜 신록의 이 길을 걸은 게 재작년이다. 길은 그대로인데 풍경은 사뭇 달라 무릎까지 차는 눈에 푹푹 빠지며 미답지를 답사하는 탐사대의 일원처럼 두근거렸다. 목장의 말들은 잘 손질된 가죽으로 보이는 매끈한 고동색 외투를 걸친 채 흰 눈밭에 서서 울타리에 매달린 건초더미에 주둥이를 내밀어 마른풀을 빼내 우걱우걱 씹고 있었다.
눈길에 도장을 찍은 짐승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렸고 삼나무의 가지들은 무거운 눈을 잔뜩 실은 채 하늘로 뻗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설원에 찍힌 내 발자국을 돌아보며 ‘그래, 이 맛이야’라며 온몸을 흔들거렸다.
이번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한라산 영실 매표소 입구에서 윗세오름, 남벽 분기점, 평궤 대피소, 돈내코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영실 매표소부터 윗세오름까지는 한라산의 설경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저잣거리처럼 붐볐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준비해 간 주먹밥과 후루룩 마시기 좋게 끓인 누룽지탕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체감온도가 –10도 내외라는 기상 예보를 보고 꾸깃꾸깃 챙겨 넣은 옷 등으로 불룩하게 나온 배낭을 다시 둘러맨다. 실제로 이날의 기온은 사진 몇 장을 찍으면 손이 시릴 정도의 적당히 추운 겨울 날씨였다.
윗세오름에서 남벽 분기점으로 가는 길의 멋진 풍경은 지구 밖의 세계에 닿은 듯한 풍경이었다. 선자지왓의 너른 고산 평원에 하얗게 쌓인 눈, 말갛게 내리쬐는 햇살, 새파란 하늘, 바람은 잠들어 고요하고 오가는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하얗다 못해 시린 설경, 설빙으로 완전히 무장한 구상나무 터널을 지나면서 오랫동안 꿈꾸던 공간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 어디엔가 가려고 집을 나설 때 늘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론 귀찮다는 생각도 들고, 주부의 부재로 불편을 겪을 가족들 생각에 미안한 마음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서 팔딱이는 생동감을 얻고 집으로 가면 나른한 일상이 즐거움으로 업데이트되어 더 신나게 뭔가를 하게 된다. 귀찮고 미안함은 잠시이나 퍼덕이는 활력이 몸과 마음의 건강함을 유지하니 길게 보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정임에 틀림이 없다.
며칠간 계속 신고 다닌 아이젠이 맨발로 걷는 것처럼 착 달라붙는다. 운동과는 담쌓고 지내던 내가 육십 대 중반에 이 정도를 해낼 수 있어서 좋다. 편안한 소파에 기대어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웅크리는 대신 이렇게 길을 나서고 함께 걸어줄 친구가 있어서 더욱 기쁘다. 우리의 행복한 동행이 오래가기를 기원하면서 아름다운 여정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