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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디로 갈 것인가?

나만의 공간 만들기

by Leo
나를 말해주는 공간


아침에 일어나 어딘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은 딱 3개월까지만 좋았다.


사람은 공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일상은 장소와 깊이 얽혀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향하던 출근지는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했고, 퇴근 후의 집은 하루를 마무리하며 안식을 얻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출근지가 사라지고, 아침에 눈을 뜨면 가야 할 ‘어디론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처음엔 달콤하게 느껴지던 자유가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운 공백으로 다가온다.


어디로 갈 것인가?

“집은 참 편안한 공간이었는데, 이제는 내 하루를 가둬버리는 감옥처럼 느껴진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다. 그동안 자신을 규정하던 장소가 사라지면,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은퇴 후 시간의 자유는 생각보다 쉽게 고독으로 연결되고, 그 고독은 결국 ‘내가 있을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매일 어디로 향할 것인가?


직장인은 가고 싶은 곳은 많지만 시간이 부족하고, 은퇴자는 시간이 많지만 갈 곳이 없다. 물론 발길을 옮길 수 있는 장소는 많다. 하지만 그곳이 자신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면,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이방인일 뿐이다. 때로는 억지로라도 ‘가야 할 곳’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나만의 시간을 채워줄, 내가 있어야 할 공간이 필요한 이유다.


안식년을 준비하며 나는 이런 공백을 예상했다. 그래서 몇 가지 옵션을 마련해 두었다. 요일별로 가야 할 장소를 만들고, 공백의 시간을 장소로 하나씩 채웠다.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하루종일 공방에서 목공수업을 들으며 가구를 만들었고,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집 근처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읽거나 명리학 공부를 했다. 나머지 요일은 그때그때 지인들과 약속 일정을 잡거나 가야 할 곳을 정했다.


자주 갔던 한강이 보이는 도서관


연초에는 요리학원으로, 봄에는 바이크 면허 연습장으로, 가을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 준비를 하며 내가 가야 할 새로운 장소를 정하며 내 시간을 채웠다. 매일 이동하며 움직이다 보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 보 이상을 걸었다. 덕분에 집에서 무기력하게 보내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그럼에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여전히 집이었다. 몇 해 전, 코로나 시기였을 때 아내와 시작한 ‘각자 방 만들기 프로젝트’는 꽤 의미가 있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아내와 쓰던 방을 분리한 것이다. 서재로 창고처럼 쓰던 조그만 방을 내 방으로 만들었고, 각자의 방을 각자의 취향으로 탈바꿈시켰다.


밝은 화이트톤의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하는 아내의 공간과 달리, 내 공간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웠다. 전동 침대를 장만하고, 거실의 TV를 방으로 들여와 애플티브이와 연결하고, 벽에는 테니스 라켓을 걸어두고, 그동안 만든 클레이 작업을 진열했다. 바로 옆에는 직접 만든 테이블을 두고, 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클레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나만의 아지트로 만들었다.


내 방, 내 취미


3평 남짓의 아담한 방이지만, 온전한 자신의 동굴을 만든다는 것은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꽤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만족스러운 결정이었고, 수면의 질, 삶의 질도 모두 올라가는 효과가 있었다.


많은 중년 남성들이 '나는 자연인이다'의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이유가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자신의 동굴'을 꿈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직위와 일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 상대적으로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숨기며 은둔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쓸모'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욕망과 현실의 괴리를 자신만의 동굴에서 위안받으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조그맣게라도 가져보는 것을 추천한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그림자처럼 보여줄 공간은 그 자체만으로 위안을 준다.


마음 같아서는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처럼 남쪽 바닷가 어딘가에 자신만의 '슈필라움(Spielraum)*'을 만들어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나만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나의 흔적을 만들고, 기록하고 싶다. 그리고 매일 그곳으로 향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슈필라움 : 독일어로 '놀이 Spiel'와 '공간 Raum'을 합친 말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의미)


은퇴 이후야말로 내가 있을 공간이 필요하다. 지금부터라도 그 공간을 기획하고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자신만의 터전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새로운 공간을 설계하고,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나를 다시 만들어가는 일이다. 회사라는 무대는 사라졌지만, 자신만의 무대를 세울 수 있다면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바이크 면허도 땄으니 어디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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