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권 한 장과 시원한 소맥 한 잔
얼마 전부터 가계부를 씁니다. 매일 성실히 꼬박꼬박 쓰는 것은 아니라 몇 천 원씩 비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꾸준히 쓰다 보면 어디에 얼마나 쓰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적은 살아가며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가계부를 적으며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얼마나 돈을 가볍게 써왔는지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쭙잖은 허세를 부리며 술값을 내거나, 스스로에게 고생했다는 위로를 베푼다는 핑계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며 적지 않은 돈을 쓰고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더군요. '대충' 얼마를 썼다고 가정하다가 월급이 들어오기 직전에 현금이 없어 허덕이던 때와는 달리, 어느 정도는 쓸 수 있는 돈을 정해놓게 된 것은 나름의 성과입니다.
가계부를 적게 되면서 저의 가난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그건 현재 얼마의 금액을 가지고 있고, 얼마큼의 금액을 쓸 수 있는지를 숫자로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 만은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 쓰고 있는, 쓰지 않아도 괜찮았을 돈을 확인하게 됨이 더 와닿았습니다. 지방에서 태어나 상경하며 독립한 게 아니라, 애초에 서울 사람이라 부모님의 집에 몇 년 더 얹혀살았다면 지난 십여 년 간 매달 수십 만 원의 월세를 쓰지 않았을 거라는 아까움이나, 집안 사정으로 부모님께 돈을 보탤 일이 생겼을 때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면 굳이 대출을 받고 이렇게 매달 이자를 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서글픔 등으로 찾아오는 감상입니다. 일종의 상대적 박탈감인 셈이지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타인과의 비교로 지금의 내가 얼마나 갖지 못했는 지를 자조적으로 관찰하는 게 얼마나 미련한 일인지는 잘 압니다. 그러나 미련하고 의미 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은 현생을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런 생각이 들 때 '이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어'라고 의식적인 다른 생각으로 억누를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떠오르지 않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언가를 보고 어떠한 생각이 드는 것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감정을 죽이는 약을 먹으며 통제하는 영화 <이퀼리브리엄> 속의 세상처럼 더욱 계산적이고 삭막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주 복권을 삽니다.
술을 한 잔 걸치고 알딸딸한 상태에서 복권집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섭니다. 굳이 근처에 있는 가게를 검색하고 찾아가지 않아도 복권집은 꼭 그렇게 그 동네 어드메에 지나가는 길에 나타나곤 합니다. 그렇다고 무턱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주에 복권을 산 기억이 없을 때 그렇습니다. 몇 천 원의 복권 값도 모이고 쌓이면 큰돈이 되니까요. 일주일에 2~3일은 알딸딸한 상태에 집으로 향하니, 매주 한 번씩은 사는 셈입니다. 당첨이 될 것이라는 확신은 물론 없죠. 확신을 갖고 사면 그게 복권이겠습니까. 하지만 "당첨되세요"라는 복권집 사장님의 인사를 들으면서 가게를 나서면 막연한 희망이 생기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당첨이 되면 무엇을 할지 막연한 상상을 하게 됩니다.
복권을 구매한 돈도 가계부에 꼭 기입합니다. 로또복권을 5천 원어치 살 때도, 즉석복권을 2천 원어치 살 때도 빠트리지 않고 적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웃기지만, 다른 항목들을 적을 때에는 'A쇼핑몰에서 건전지 구입'이라던가 'B시장에서 반찬 5팩'처럼 구체적으로 적는 가계부에 복권값만큼은 다르게 적습니다. '꿈값'이라고 말이죠. 신라시대 김유신의 동생들 일화처럼 실제로 꾼 꿈을 대가를 주고 사는 걷은 아니고요. 복권을 사면서 꿀 수 있는 꿈의 비용이라는 의미에서, 재미삼에 그렇게 적기 시작한 것이 고정되었습니다.
복권은 당첨될 것을 기대하며 사는 마음도 있지만, 당첨되면 무엇을 할까 상상하게 되는 효과로 사는 것 같습니다. 주로 복권이 주말에 추첨을 하니 월요일이나 화요일 즈음 한 주가 시작될 때 복권을 삽니다. 당첨발표가 날 때까지 지갑에 잘 접어 넣은 복권을 볼 때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십니다. 1등에 당첨되면 대충 세금을 떼고 얼마큼의 당첨금을 받게 될 텐데 그 돈을 어떻게 쪼개어 어디에 쓸지 상상하며 키득거리고는 하는 거죠.
이렇게 밖에 꿀 수 없는 꿈이 있습니다.
다달이 월급을 받고, 그것을 쪼개어 생활비로 쓰는 삶이 그렇습니다. 월급의 총액은 얼마 되지 않는데, 홀로 서울살이 하며 살림을 꾸려나가다 보면 나갈 돈은 많기만 합니다. 전세대출과 신용대출 이자, 휴대폰 요금과 전기세, 가스비 등의 공과금을 내야 하고요. 물만 먹고살 수는 없으니 당연히 필요한 식비와 은근 자주 생기는 주변 사람들의 경조사에 들어가는 돈도 있습니다. 드넓은 서울에서 출퇴근을 걸어서 할 수는 없으니 매달 10만 원가량 쓰게 되는 교통비와 가끔 있는 모임의 회비도 적지 않은 돈입니다. 이렇게 쪼개고 또 쪼개어 쓰다 보면 적금을 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 달을 간신히 살며 그걸 또 아등바등 쪼개 모으는 입장에서는,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하고 싶다고 상상하는 것들은 정말로 꿈처럼 막연하고 손에 닿지 않는 묘연한 일입니다. 당첨금을 받으면 얼마를 쪼개어 더 늙기 전의 부모님과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얼마를 종잣돈으로 삼아 내 집마련을 한다거나, 한 달 정도 회사도 신경 쓰지 않고 국토종주나 산티아고 순례 등을 떠난다거나, 애인과 날을 잡아 결혼을 하겠다는 등의 꿈을 꿉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일들인데 그렇지 못하기에 꿈으로 남은 일들입니다.
주변 이들의 신혼집 장만이나 해외여행 등 부러운 소식을 전해 듣는 날이면, 가계부를 쓰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곤 합니다. 이러한 박탈감들이 모이고 응어리져서, 차마 그것이 못되고 악의적인 감정으로 표출되지는 못하고, 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좋은 소식을 들으면 대놓고 부럽다고 말하며 울상 지을지언정, 그 사람이 잘못되길 바라지는 못하는, 많이는 아니고 적당히 선량하고 평범한 흔하디 흔한 사람이니까요.
막연하게라도 꿈을 품게 되면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기 마련입니다.
어린 시절 엄마를 붙잡고는 커서 무엇이 될 것이라고, 그 꿈을 가진 것도 자랑인 것처럼 이야기하듯 말입니다. 복권을 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권을 샀노라며 이야기합니다. 맨 정신에는 그런 말을 꺼낼 일도 별로 없는데, 정말 편한 술자리에서는 꼭 한 마디씩 툭 내뱉습니다. 지금 내 지갑에 얼마가 들어있는지 아냐며, 자그마치 10억이라고 말하고는 깔깔 웃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의아해하던 사람이 한 박자 늦게 알아채고는 콧방귀를 뀌며 웃으면 제 웃음소리는 더 커집니다.
그렇게 마시는 술은 또 비싼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아껴가며 조금씩 홀짝거리는 위스키도 아니고, 나름 운치 있는 곳에서 분위기 잡으며 마시는 와인도 아닙니다. 퇴근하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어느 식당에서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병을 시켜, 적당한 비율로 흔들어 마시는 소맥이 대부분입니다. 왁자지껄 현실성 없는 꿈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며 마시기에는 그 만한 술이 없습니다. 삼겹살이나 찌개 같은 평범한 안주에 적당히 배부르고 적당히 취할 수 있는 소맥이야말로 시답잖은, 그러나 나름의 애환과 포부가 있는 이야기를 하며 웃기에 제격입니다.
정말 진지하게 비전과 포부를 나누는 술자리에서는 깔깔거리며 꿈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고, 입꼬리를 한껏 내리며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며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가벼운 농담이더라도 꿈을 꺼내지 않습니다. 딱 맞는 사람들과 딱 맞는 자리에서 소맥을 한 잔 나눌 때, 그때 막연하게 생각하는 꿈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며 각자가 가슴속 깊이 담아두고 있는 두루뭉술함을 풀어내게 됩니다.
소맥은 이제 잘 섞습니다.
맥주잔에 소주를 소주잔으로 반 잔 정도 따라 넣고, 맥주잔에 새겨진 브랜드 로고 바로 아래 선에 닿을 정도로 맥주를 넣은 뒤에 잔의 위쪽을 손가락 끝으로 잡고 손목에 힘을 넣어 두어 번 치듯 돌리면 잔 안에서 섞인 술들이 소용돌이를 만들곤 합니다. 처음 술을 접하던 어릴 때에야 비율도 따지고, 멋을 낸다고 젓가락 두 개를 잡아 후려치며 거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제는 소맥을 만드는 것도, 잘 섞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합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몸에 밴 습관처럼 가볍게 합니다.
선배나 다른 어른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려다가 술을 흘린 적이 많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집착했나 싶기도 하고, 왜 그렇게 어설펐나 싶기도 합니다. 그 무렵에 꾸었던 꿈이 지금과 어떻게 다른 지 생각해 봅니다. 제법 다릅니다. 스무 살에 꾸었던 꿈을 10년 넘게 지나 돌이켜보면 정말로 현실 인식 없는 허황된 꿈인 것도 있고, 정말 아무렇지 않게 이룰 수 있던 것도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꿈 이야기를 하는 술자리가 퍽 즐겁다는 것과, 그렇게 곁들이는 게 가격 부담이 덜하고 만만한 소맥이라는 것이네요.
꿈을 꾸는 것도 사치라고 할 만큼 삭막한 세상에서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막연한 희망을 주고, 주변 사람들과 낄낄거리며 공유할 수 있는 꿈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꿈 값은 복권 값 오천원일 때도 있지만,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병을 합쳐 만오천 원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계부에 꿈값이라고 적기에는, 한 달에 마시는 꿈 값이 적지 않을 것 같아서, 제대로 언제 마신 술 값이라고 적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