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갓 부친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
비가 오는 날은 평소와는 약간 다른 상태가 됩니다. 온몸의 피부로 와닿는 습기 탓에 괜스레 축 처지기도 하고, 빗물을 머금은 흙과 나무가 풍기는 냄새에 살며시 미소를 짓기도 하지요. 취향도 달라집니다. 평소에는 잘 듣지 않던 클래식을 찾아서 듣고 싶어지고, 그렇게 음원 어플에서 추천곡을 틀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커피를 마시기도 합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 하더라도 꼭 따뜻한 음료를 마십니다. 아이스로 마시면 괜히 더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어서요.
유난스럽게도 어린 시절부터 비를 맞는 걸 좋아했습니다. 덕분에 비 맞고 다니면 대머리가 된다거나, 네가 무슨 제임드 딘인 줄 아느냐는 어른들의 이야기도 종종 들었죠. 그래도 굴하지 않고 비가 오는 날은 일부러 더 걸었습니다. 우산이 있으면 우산을 쓰고, 우산이 없으면 그냥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었습니다. (스트레스성 원형탈모 이후 약을 꾸준히 먹고 있긴 하지만) 다행히 아직 대머리는 되지 않았고, 불행히 제임스 딘처럼 멋들어진 청춘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요즘도 종종 비를 맞으며 걷고는 합니다. 빗방울이 때리는 소리부터 살벌해서 맞으면 아플 것 같은 폭우 말고, 추적추적 촉촉하게 내리는 부슬비는 적당히 맞으며 걸을 만합니다. 어릴 때와는 달리 무거운 책가방을 메지 않아도 되고, 요즘 휴대전화는 방수기능이 잘 되어있다고 하니 걱정 없이 비 좀 맞을 수 있지요. 우디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는 비 오는 파리를 좋아하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 영화를 볼 때마다 비 오는 파리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과 비 오는 서울도 파리 못지않게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곤 합니다.
각인효과는 무섭습니다.
'일요일은 내가 요리사'라는 어느 라면 광고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겠지요. 수십 년간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문장을 저는 대단히 잘 만들어진 카피라고 생각합니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난 일요일 점심에 딱히 먹을 것이 정해지지 않는다면 가장 먼저 그 짜장라면을 끓여볼까 생각하게 되니까요. 막 끓인 면에 분말수프와 기름을 넣고 저을 때 풍기는 달큼한 냄새는 상상만 해도 입맛을 다시게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일요일에 짜장라면을 끓이는 집이 못해도 1만 가구는 되지 않을까요.
비가 오는 날도 그렇습니다. 빗 속을 걷는 것 못지않게 창 밖으로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좋아합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기름냄새가 생각납니다. 아스팔트 바닥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면 기름 위에서 밀가루 반죽이 튀겨지며 내는 자글과 지글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삭막한 사무실에 앉아있으니, 근방 몇 미터 이내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날 일이 없는데, 마치 옆에서 무언가 부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여러 종류의 부침개가 스쳐갑니다.
녹두를 갈아내고 나물과 고기를 섞어 두툼하게 부쳐낸 빈대떡, 적당히 묵은지를 송송 썰어 넣은 새콤 짭짤한 김치부침개, 잘 씻은 부추를 넓게 펼쳐 가장자리를 바삭하게 튀겨내는 부추전까지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또 막걸리가 생각납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지금껏 살면서 술을 마신 날보다 마시지 않은 날이 더 많을 테고, 술을 마신 날 중에서도 막걸리를 마신 날이 차지하는 비중은 정말 얼마 되지 않을 텐데, 이런 의식의 흐름이라니요. 그야말로 기승전'술'입니다.
한번 생각한 것은 이루어 내야 직성이 풀립니다.
먹는 것이라면 특히 그렇습니다. 이것도 분명 욕심일 테고, 이 욕심을 떨쳐내야 조금은 더 건강하고 자유로워질텐데 아직까진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욕심을 떨쳐내는 것은 부처님의 삶이고 성인들의 삶이니, 속세에서 때를 묻히며 사는 저의 것이 아닐 테니,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네. 이러니 저러니 거창하게 말해도 결국은 비 오는 날에는 부침개에 막걸리를 먹고 싶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1년에 100일 정도 비가 온다고 하는데, 그 100일 중 막걸리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날이 얼마나 될까요. 이런 날을 놓치는 것은 아쉽지 않겠어요.
비 오는 퇴근길은 불편합니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우산을 펴고 또 접어야 하고, 버스 안에서도 가득한 습기와 손에 들린 우산 탓에 번거롭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게 기대되는 만큼 참을 수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보니 비가 조금 잦아들어 맞을만합니다. 마침 비를 피하기 위해 가방도 사무실에 두고 나온 덕분에 비를 맞는 게 걱정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 번씩 비에 젖어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넘긴 채 걷다 보면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 초입에 편의점이 나타납니다.
인사를 하며 편의점에 들어가면 시원한 에어컨이 비에 젖어 찝찝한 몸을 식혀줍니다. 더운 날 에어컨이 틀어진 실내에 들어선 순간의 쾌적함이 좋습니다. 후텁지근하고 습하던 공기가 건조하고 찬 공기로 바뀌면 코로 들이키는 숨의 상쾌함이 배가 됩니다. 편의점 바닥에 물을 떨어트리지 않게 가볍게 몸을 털고는 바로 가장 안쪽의 냉장고로 향합니다. 여러 종류의 맥주와 소주가 유혹하지만 오늘의 선택은 명확합니다. 막걸리를 한 병 집어 들고는 바로 계산대로 향합니다. 오래 있으면 다른 것들을 더 사게 될 수 있으니, 꼭 살 것만 사고 서둘러 나오는 게 좋습니다.
비 맞은 뒤의 샤워는 몸을 편안하게 합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빗물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옷을 벗고 바로 샤워를 합니다. 따뜻한 물이 기분 좋게 몸을 녹여주고, 평소보다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서 있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잘 닦아주며 나와서는 가장 편한 반팔과 반바지를 꺼내 입습니다. 씻기 전에 미리 틀어둔 에어컨 덕에 온수로 노곤해진 몸이 기분 좋게 식습니다. 이럴 때 소파에 앉거나 침대에 누우면 안 됩니다.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칫 잠이라도 들어버리면 저녁의 계획이 모두 엉클어집니다. 바로 냉동실에 막걸리를 넣고, 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냅니다.
널찍한 스테인리스 대야에 부침가루와 물을 넣어 잘 풀어줍니다. 가루가 뭉치지 않게 젓가락을 상하좌우로 젓다가 때로는 원형을 그리며 젓습니다. 계란을 한 알 깨어 넣고 함께 저어준 뒤 아주 약간의 소금을 넣어 간을 합니다. 김치통을 열어 집게로 묵은지를 꺼내며 바로 대야 위에서 가위로 잘게 자릅니다. 김치국물을 한 국자 떠서 넣고, 반죽과 섞여있는 김치를 다시 한번 잘게 잘라주면 준비는 끝납니다. 돼지고기나 해산물 등을 넣어주면 더 좋겠지만, 1인 가구의 냉장고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무 때나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 불을 최대한 세게 키고, 적당히 해바라기씨유를 둘러 달궈줍니다. 에어컨을 틀어놓았어도 불 앞에서는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집니다. 팬이 달궈지면 국자로 부침개 반죽을 크게 떠서 올립니다. 잘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반죽이 익어가면 집안이 온통 기름냄새로 가득 찹니다. 쏟아지는 비를 보며 떠올렸던 그 냄새, 그 소리입니다. 주방 옆에 난 창문을 살짝 열어 빗소리를 들어봅니다. 그 사이 다시 굵어진 빗줄기는 부침개를 먹기에 아주 제격입니다.
딱 이 만큼이면 좋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부침개 두 장이면 혼자 즐거운 저녁을 보내기 충분합니다. 가장자리는 바삭하게, 중심부는 부드럽게 잘 익은 김치부침개를 접시에 옮겨 담은 뒤 TV 앞 밥상에 올려놓습니다. 작은 간장종지에 고춧가루와 간장, 식초를 넣어 찍어먹을 양념을 만들고 냉동실에서 차갑게 식혀진 막걸리를 꺼냅니다. 플라스틱 막걸리병을 뒤집어 살살 흔듭니다. 마구 흔들지 않고 이렇게 천천히 섞으면 병을 열 때 폭발하듯 탄산이 새어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병을 바로 들어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면 약간의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막걸리의 단내가 올라옵니다. 막걸리향은 부침개의 기름냄새보다 더 강렬합니다.
예전에 어디에선가 사은품으로 받았던, 노란색 알루미늄 막걸리잔에 술을 따르고 젓가락을 들어 부침개를 찢어 입에 넣습니다. 막 부쳐낸 부침개는 많이 뜨겁지요. 입을 동그랗게 말아 김을 몇 번 뿜어내고는 바로 잔을 들어 막걸리를 홀짝이며 열을 식힙니다. 부침개 속 김치의 새콤함과 막걸리의 시큼함은 궁합이 잘 맞습니다. 사실 막걸리는 그리 높지 않은 도수에 청량감이 있어, 어디에 먹어도 궁합이 좋은 술이죠. 그런데 유난히 이렇게 기름진 부침개와 먹을 때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요.
비가 오니 문득 부침개와 막거리 생각이 나서, 그렇게 두 가지를 혼자 차려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무언가를 보며 떠오르는 게 있다는 것은 어쩌면 지나간 시간 동안 쌓아왔던 여러 경험과 추억들이 잊히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언젠가 어디선가 '부침개에는 막걸리지'라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이렇게 비 오는 날 막걸리가 당기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막걸리처럼, 비 오는 날에는 떠오르는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지나간 사람과 지나간 추억들이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동안 여럿 스쳐 지나갑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유난히 센티해지기 마련이고, 그런 날 술을 곁들이면 그리움과 외로움과 편안함을 함께 느끼며 비를 한껏 머금은 먹구름처럼 축 늘어지게 됩니다. 술을 마시는 것도, 누군가 생각나는 것도 다 비가 와서 그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