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꺼운 잔에 온더락 위스키 한 잔
가끔 불안함이 솟구칠 때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렇습니다. 할 일이 없어도 무엇을 놓친 것 같고, 만날 사람이나 연락할 일도 없는데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집니다. 괜히 찝찝한 마음에 무언가 할 일을 찾아보아도, 마땅히 생각나는 것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이건 정말 '그냥' 찾아온 불안함이니까요.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떠오르는 생각들은 유쾌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잊고 싶은 경험, 후회되는 경험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언젠가 다르게 행동했으면 어땠을까 상상이 펼쳐지고,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음을 자각하며 답답함을 느낍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가 깊어질수록 현재에 대한 불안함은 커져만 갑니다. 지금 내가 걷는 길이 옳은 길일까, 나의 선택은 정답일까, 훗날 오늘의 나를 돌아볼 때, 지금의 내가 과거를 돌이키며 느끼는 후회를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불안은 눈과 눈 사이에서 옵니다. 미간에 힘이 들어가면 불안은 눈 밑을 타고 내려갑니다. 눈에 힘이 들어가며 눈가가 예쁘지 않은, 축 처져 곧 울 것 같은 반달을 그리면 답답함이 목젖을 타고 명치까지 내려갑니다. 가슴을 꽉 조이는 불안함에 숨이 조금 가빠지고 호흡은 더 깊어지고 길어지며 한숨이 됩니다. 한숨도 쉽게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목젖 언저리에서 과속방지턱을 만난 자동차마냥 속도를 한껏 늦추고는 철렁하는 느낌과 함께 터져 나옵니다. 혼자 있으면서도 누군가 이 한숨을 들을까 걱정하며 주위를 의식합니다. 이 의식조차 불안의 산물인듯하여 더욱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혼잣말로 묻지만 당연히 거기 답해줄 이는 없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인데,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물이 가득 찬 욕조에 갇혔는데, 배수구 마개를 찾을 수 없어 서서히 가라앉는 것 같은 막막함이 들면 온몸이 무거워집니다. 보이지 않는 무수한 손이 팔다리를 움켜잡고 어딘가 끌어내리는 기분입니다. 시도 때도 없는 불안은 치울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타난 불안이기에, 나도 모르게 다른 생각이 들도록, 한껏 날카로워진 감각의 각도를 예각에서 둔각으로 조금씩 무디게 만드는 것이 최선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 어렵다기보다 받아들이기 싫다에 가까운 불안이 몰려올 때면 냉동실을 열어 시원한 얼음을 꺼냅니다. 찬장을 열어 격자무늬가 새겨진 두꺼운 올드패션드 위스키잔을 내려서 큼직한 얼음을 세 개 정도 담습니다. 얼음을 한 개 더 꺼내 눈가에 문지르면 미간에 들어간 힘을 녹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손가락 끝에 힘을 넣어 잔 위쪽을 잡아 손목을 돌리면, 딸그락거리는 얼음과 유리잔의 마찰음과 함께 냉기가 잔 전체로 퍼집니다.
술병을 세워둔 책장 앞에 서서 어떤 것을 따를지 고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느 고풍스러운 바에 있는, 바텐더 뒤의 의리의리한 선반을 떠올리겠지요. 사실 가지고 있는 술은 몇 병 되지 않아 선택지가 다양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중 가장 좋은 술을 꺼냅니다. 불안을 잊을 때는 '그깟 가격은 개의치 않는다'며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까짓 술값'처럼 '그까짓 불안'이란 의식의 흐름이 중요합니다.
술병의 마개를 힘주어 열며 경쾌한 '퐁'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집니다. 알코올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재미있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 덕분입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통로가 생겨 빠져나온 위스키 특유의 향이 코 끝을 스칩니다. 내쉬기도 어렵던 한숨과 달리, 한 번 더 향을 맡으려 들이키는 숨이 막힘없이 목을 지나 폐를 부풀립니다. 긴 호흡에 몸통이 부풀며 조여오던 답답함도 느슨해집니다.
얼음 사이로 흘러내리는 위스키 소리는 경쾌합니다.
병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잔에 따르면 얼음이 조금씩 녹아내리며 잔의 벽에 부딪히는 짤그락 소리가 납니다. 위스키가 얼음에 부딪히고, 또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소리, 액체가 병의 입구를 비집고 나오며 꿀렁대는 소리는 제법 듣기 좋습니다. 잔의 절반 정도를 채운 뒤 병의 마개를 다시 닫습니다. 혹시라도 새어 나오지 않게 힘을 줘 꽉 막습니다. 술을 따를 때 병의 입구에 묻은 약간의 위스키는 엄지손가락 끝으로 닦아 입으로 가져갑니다. 감자칩을 먹다가 손에 묻은 가루를 핥을 때와는 달리, 입을 맞추듯 살짝 빨아냅니다. 알싸하면서도 달큼한 향이 코를 넘어 입 안까지 들어옵니다.
다시 잔을 빙빙 돌리며 얼음과 함께 출렁이는 위스키를 느껴봅니다. 바닥이 두꺼운 올드패션드 잔은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채워진 잔을 들고 네 발짝 쯤 떨어진 소파에 앉습니다. 몇 년 전에 1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저렴한 가격에 구매한 파란색 2인용 패브릭 소파는 조금씩 흔들리긴 하지만 아직 몸을 한껏 기대어 체중을 실을 만합니다.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며 숨을 다시 한번 크게 내쉽니다. 그쯤 되면, 불안함은 반 정도 무뎌져 있습니다.
위스키를 홀짝일 때는 다른 행위는 부수적입니다. 노래를 틀어도 귀 기울여 가사를 곱씹지 않고, TV를 틀어 놓아도 배경음처럼 여길 뿐 집중하지 않습니다. 천장의 환한 LED등보다 은은하고 편한 노란 전등을 틀어놓아도 좋고, 불을 모두 끈 채 TV 화면의 밝기에만 의지하는 것도 좋습니다. 위스키 한 잔을 향과 소리까지 구분하며 즐길 정도의 소양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때, 술을 마시는 행위가 나 만을 위한 행위가 됩니다. 허세일 수도, 자기기만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게 기분은 조금씩 더 좋아집니다.
이유 있는 불안과 이유 없는 불안은 다릅니다.
불안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그 원인을 해소할 때 불안도 함께 사라집니다. 문제 될 일을 해서 불안한 것이라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면 될 것이고, 정해진 기한 탓에 불안한 것이라면 그 기한이 지나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이유 없는 불안은 그렇지 않죠.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당장의 불안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또 다른 불안이 솟아납니다. 불안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고, 우리는 그렇게 수시로 번민하고 침잠하는 시간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불안할 땐 위스키를 찾습니다. 이유 모를 불안을 다른 감정으로 덮기 위함입니다. 기왕이면 긍정적인, 스스로를 잘 챙겨주고 있다는 위안으로 떨쳐내기 위함입니다. 그게 또 제법 효과가 좋거든요. 다만, 불안이 너무 자주 찾아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잦은 불안은, 너무 많은 위스키 소비로 이어질 테고, 그건 아마 제 지갑이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