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 Sep 20. 2024

#2 - 소주나 한 잔 하시렵니까?

- 퇴근하고 순댓국에 소주 한 잔

 집에 가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출근은 늦을수록 좋고, 퇴근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집에 가면 할 일도 많습니다. 챙길 것도 많고요. 1인 가구의 가장에게는 가족의 행복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없는 집에서는 누구도 밥을 차리거나 빨래를 해주지 않습니다. 불쌍한 9평짜리 작은 전세방은 제가 귀가할 때까지 사무치는 외로움을 참아가며,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게 있어야 합니다. 얼른 귀가해서 집도 챙기고, 저도 챙겨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집에 가는 방법은, 야근을 하지 않고 저녁 약속도 잡지 않은 채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부리나케 사무실을 나와 시내버스를 타는 것입니다. 저와 거의 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번화가의 빌딩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 어떻게든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머리 위에 매달린 손잡이 하나에 의존해서 사방에서 느껴지는 주변 사람들의 압박을 버텨야 합니다. 버스 전용차선까지 막히는 퇴근길 교통체증이 주는 답답함을 달래주는 것은 귀에 꽂은 무선이어폰과 선택할 수 없이 무작위로 흘러나오는 노래뿐이죠.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온몸에 힘이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하지만,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하고 저녁까지 먹어도 여덟 시가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몸과 마음이 모두 편해집니다. 잠들기 전까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시간이 생기니까요. 노래를 들으며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만 해도 하루 종일 줄어든 체력 게이지가 충전되는 기분입니다. 사람의 몸이 휴대폰과 같다면, 편히 쉴 수 있는 집은 무선충전기 같은 존재일 겁니다.


그런데 가끔은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일상에 치이다가, 업무를 보던 중 마음의 상처를 입고, 그냥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 일과시간이 끝나도 바로 집으로 향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습니다. 협력 기관이 기한을 지키지 않은 탓에 전체적인 일이 틀어질 뻔했습니다. 어떻게든 수습을 했지만 짜증은 가시지 않습니다. 모니터 앞에서 인상을 쓰고 있으면 시간도 잘 가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에게 티는 내지 못하고 한숨만 쉬고 있노라면 무언가 얹힌 것처럼 답답하기만 합니다. 평소 같으면 조금씩 엉덩이가 들썩거릴, 퇴근시간 10분 전에도 마음은 가볍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가득한 만원 버스를 탈 생각에 그렇지 않아도 가득 찬 스트레스가 더 쌓입니다.


 식욕도 없고, 할 일도 없고, 이렇게 집에 가더라도 도저히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메신저를 켜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직장 동료에게 살며시 말을 겁니다.

 "혹시 오늘 퇴근하고 일정 있으세요?"

 번거롭거나 불편할 수도 있고, 선약이 있을 수도 있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고 편하게 건넨 질문입니다. 신기하게도 퇴근 시간 직전에는 다들 답장이 빠릅니다. 일정이 있다는 답변 대신, 왜 그렇냐던가 무슨 일 있냐는 답이 오면 오늘의 번개가 성사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겨 다시 물어봅니다.


"별건 아니고 간단히 소주 한 잔 하시렵니까?"


 흔쾌히 그러자는 답이 날아오면 그때부터 조금씩 기분이 좋아집니다. 무엇을 먹으러 갈지, 나가서 어디에서 만날지 정하는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으면 신이 나기 시작합니다. 서로 몇 군데의 가게를 적어 보내면 선택지도 금세 좁혀집니다. 날이 더워서 불판 앞에 앉기는 싫고, 기분이 안 좋아서 술이 당기는지라 맥주보다는 소주가 좋다는 식의 대화가 오가다 보면 메뉴가 금세 정해집니다. 점심에는 줄을 잔뜩 서야 해서 쉽게 가지 못하는 국밥집으로 가자는 상대의 말에 여느 날의 퇴근시간처럼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나가는 사람이 식당에 가서 줄을 서거나 자리를 잡기로 하고, 6시가 되자마자 가볍게 주변의 눈치를 보며 의자에서 일어납니다. 다들 퇴근하려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는 내일 뵙겠노라고 인사를 하며 사무실을 나섭니다. 엘리베이터가 정원초과 되지 않아 제 때 탈 수 있음에 안도합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퇴근 시간의 묘한 즐거움이 느껴지는 얼굴들이 보입니다. 내리자마자 건물 현관을 빠져나오며 빠른 걸음을 시작합니다. 식당에 줄을 서지 않겠다고 달려가기는 좀 그러니까, 배낭의 어깨끈을 단단히 움켜쥐며 달리기라고 부르기 애매한 정도의, 굳이 말하자면 육상대회의 경보와 흡사한 자세로 걸어갑니다.


 미식가이자 술꾼으로 유명한 어느 가수의 유튜브에 출연해서 한동안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맛집인데 오늘따라 문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마에 땀이 송글거릴 정도로 빠르게 걸은 덕분일까요. 앞에 서 있던 두어 팀이 가게로 들어가고 입장을 앞둘 무렵 함께 식사하기로 한 동료가 나타납니다. 나오기 직전, 상사가 불러 나가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 일 아니었다며 이마에 땀을 훔치며 웃습니다. 몇 명이냐 묻는 가게 종업원의 질문에 손가락을 두 개 펴 들며 밝은 목소리로 답합니다.

 "두 명이예요."


순댓국집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습니다.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코 끝을 찌릅니다. 간격이 넓지 않은 식탁에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앉아 분주히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널찍한 내장접시를 시켜놓고 웃고 떠들며 술잔을 부딪히는 사람도 있고, 혼자 앉아 이어폰을 꽂고 휴대폰을 보면서 묵묵히 국밥 한 그릇을 비워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유의 냄새와 특유의 분위기가 싫지 않습니다. 그냥 이런 게 인간군상구나 하는 짧은 단상과 함께 입꼬리가 올라가는 그런 정서입니다. 무뎌지지 않는 고깃국 냄새에 입에는 침이 고입니다.


 자리를 안내받아 앉자마자 바로 주문을 합니다. 순댓국 한 그릇과 내장탕 한 그릇, 그리고 소주 한 병. 동료는 당면을 넣어 만든 순대를 먹지 않는다며, 당면순대는 이단이고 피순대가 진짜 순대 아니겠느냐고 말하며 웃습니다. 맛있으면 장땡이라고 답하며 웃는데, 종업원이 반찬과 소주를 먼저 가져옵니다. 찬의 가짓수는 많지 않지만 오히려 이 편이 더 좋습니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소주병에는 더운 날씨 탓에 금방 물방울이 맺힙니다. 소주병을 식탁에 내려놓기도 전에 손에서 손으로 건네어 받으며 손목을 꺾어 흔듭니다. 소주병 아래에서 위쪽으로 기포가 올라옵니다. 바로 다른 손을 갖다 대며 병을 따고, 흔쾌히 번개에 응해준 동료 쪽으로 먼저 기울입니다. 한 잔 받은 그는 바로 병을 받아 들며 제 쪽으로 돌립니다. 저는 앞에 놓인 소주잔을 두 손으로 들어 그 술을 받습니다.


 가볍게 잔끼리 부딪히며 짠 소리를 내고 입으로 가져갑니다. 첫 잔은 시원하게 원샷입니다. 입을 조금 더 크게 벌리고 고개를 뒤로 탁 젖히며 소주를 털어 넣습니다. 혀 안쪽 끝에 소주의 달달함이 느껴지고, 목을 타고 명치까지 내려가는 소주를 느끼며 마주 본 우리는 이를 드러내며 '크-' 소리를 냅니다. 젓가락을 들어 깍두기를 하나 입에 넣어 어금니로 씹고, 큼직한 대파를 쌈장에 찍어 먹으면 바로 병을 들어 다음 잔을 기울이게 됩니다. 두 번째 잔을 비울 무렵 뚝배기에 담겨 이곳저곳 일그러진 스테인리스 쟁반에 올려진 두 그릇의 국밥이 나옵니다. 갓 불 위에서 내린 국밥은 아직 부글부글 끓고 있고,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옵니다.


갓 나온 국밥은 식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미 국밥 안에 들어있는 쌀밥을 뒤적거리며 섞어주고, 위쪽의 국물을 먼저 떠서 데지 않게 조심스럽게 입에 넣으면 앞서 소주를 들이켤 때와는 달리 입을 반쯤 벌린 채 성대 깊은 곳에서 탄성이 새어 나옵니다. 순대를 집어 새우젓에 찍어 먹고는, 뜨거움을 식힐 겸 바로 다음 잔을 기울입니다. 잘 익은 내장이 쫄깃해서 술을 부르고, 국물이 스며들어 감칠맛 나는 밥알이 또 술을 부릅니다. 둘이 마주 보며 대화도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처음 시켰던 소주는 금세 동이 나고, 한 병 더 주문합니다.


 두 번째 병을 기울이며 동료가 묻습니다.

 "이제 기분 좀 풀렸어요?"

 사무실에서 통화하는 소리가 다 들렸을 테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고 있었을 겁니다.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갑자기 신청한 순댓국 번개에도 시간을 내어주었겠죠. 소리 내어 답하지 않고 그냥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마주 웃으며 건배를 청합니다. 잔을 들어 그가 내민 잔에 부딪히고는 입에 털어 넣으면 퇴근 직전까지 쌓였던 짜증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집니다.


 결국 둘이 소주를 세 병 비우고, 남은 국물까지 싹 긁어 마신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이 나뉘는 곳에서 그에게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웠다고, 즐거웠다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는 덕분에 저녁 든든히 먹었다며 웃으며 등을 돌립니다. 알딸딸한 취기에 눈을 끔뻑이며 버스를 타는데, 퇴근시간이었다면 사람들로 가득했을 버스가 텅 비었습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 버스 앞 창으로 보이는 도심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신기하게 마음이 편안합니다. 집에 도착해서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이고, 바로 잠에 들면 그렇게 또 하루가 잘 지나갑니다.


 국밥 한 그릇은 하루를 씻어줍니다. 한 그릇을 다 비우는 것처럼, 하루의 자질구레한 부정적 감정들을 모두 비워줍니다. 소주 한 잔이 함께 하면 더 깨끗이, 함께 술잔을 기울여주는 동료가 있다면 더 편안하게요. 저녁 무렵 얼굴이 벌게진 채 정류장과 역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 중, 분명히 몇 사람은 이렇게 고단하던 하루를 잘 씻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겠지요.



이전 02화 #1 - 불안함은 시도 때도 없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