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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Dec 26. 2017

서른하나의 끝자락

2017년 마지막 계절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은 찬 공기를 잊어버릴 만큼 아늑했다. 고픈 배를 달래려는 직장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밀려들어왔다. 다른 때보다 많은 인원의 사람들이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이어 흘러나오는 캐럴송과 입구에 자리한 커다란 트리. 그제서야 우리는 올해가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평소 같았으면 술 약속도 잔뜩 잡고, 연차 있으면 바로 여행도 가고 그랬을 텐데. 영 연말 분위기가 안 나네.”



오늘까지만 근무하면 새해까지 쭉 쉴 수 있다는 선배는 아직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했다고 했다. 가을 초부터 제대로 쉰 적이 없어 이렇게 불쑥 바라던 시간이 찾아올 줄 몰랐다. 우리 직장인들에겐 다가올 한 주가 겨울방학이나 다름 없을 텐데. 나는 언제 쌓였는지 모를 도로 위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맘때쯤이면 따끔거리던 볼도, 부르트던 입술도 멀쩡했다. 출퇴근길 말고는 겨울과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어서일 것이다. 겨울답지 못한 겨울이 무심히 지나가고 있었다. 무심코 손을 찔러 넣은 코트 주머니 속엔 아직 새것 같은 립밤이 들어있었다.



불과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립밤은 내 필수품이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부지런히 이 계절을 즐겨서였다.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 앞엔 과일이나 반찬거리를 파는 자그마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매일 같이 보는 그곳도 계절이 바뀌면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초가을까지 동네 사람들의 그늘이 되어주던 벚꽃나무도 이파리를 모두 떨어뜨린 채 앙상한 가지만 내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질 때면 어김없이 첫눈이 내렸다. 가게 천막 위로 뽀얗게 쌓인 눈을 괜스레 툭툭 쳐보는 것도, 귀마개를 쓴 아저씨가 이리저리 고구마를 뒤집는 걸 가만히 구경하는 것도 하루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렇게 한 달이 채 안 되는 방학 동안 나는 그 계절과 꼭 붙어 지냈다. 봄에는 집 앞 살구나무가 어떤 옷을 골라 입는지, 여름이 뽐내는 과일은 무엇인지, 계절과 나란히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럴 여유조차 사라진 지금, 내게 겨울이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매일 조금씩 달라졌을 공기를, 바람을, 하늘을 나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언니,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느끼는 건, 최근에 추억할 만한 일들이 없어서 그런 거래요. 다시 떠올릴 만큼 새롭거나 특별한 일이 너무 오래전의 것들이라 그만큼 시간이 훅 지나버렸다고 느끼는 건가 봐요."



서른 하나에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엔 내 의문을 풀어줄 문구가 정성스럽게 적혀있었다. 이번 겨울이 유독 빠르게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그만큼 기억할 만한 사건이 없었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사람이 건넨 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익숙한 거리를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다운 조명 빛을 볼 수 있는 것도, 쓸쓸하지만 왠지 따스한 기분이 드는 것도 분명 이 계절만이 가진 매력일 테니. 그리고 걷는 내내, 2017년의 겨울을 떠올리면 절로 피어오르는 추억거리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제아무리 열심히 보냈더라도 아쉽고 쓸쓸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연말이 조금은 천천히 흘러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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