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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었다 폈다의 싸움

7화 : 손에 꽉 쥐고만 있을수록 더 멀어지는 아이러니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고 회사에 다닌다면 절대 피할 수 없는 게 경쟁 PT입니다. 연말이나 연초에는 여러 클라이언트의 경쟁 PT를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도 종종 있죠. 이름에 ‘경쟁’이 붙는 만큼 그 과정도 무척 치열합니다. 3개월에 걸쳐 4번의 경쟁 PT를 했던 클라이언트도 있었는데, 똑같은 숙제를 똑같은 경쟁자들과 4번 치른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죠.


그래서인지 이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승부욕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매 회의 때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득하는 일을 하다 보니 주관 또한 뚜렷합니다. 우유부단한 면이 많았던 저는 그래서 이 일을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클라이언트로부터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후,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잡고, 그에 맞는 근거를 세우고, 아이디어를 꾸려 나가다 보면 자연스레 내 생각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니까요.


그러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인턴시절에 만난 한 임원 분은 ‘마른걸레도 비틀면 물이 나온다’라는 어마무시한 말을 한 적도 있죠. 그래서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게 너무도 익숙했던 제게, 그게 꼭 능사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었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밤을 꼴딱 새우고 간 회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닫게 된 거죠.


샤워기에서 물이 솨- 쏟아질 때. 러닝머신 벨트가 도로록 도로록 돌아갈 때, 고양이가 누워있는 곳으로 달려가 벌러덩 드러누울 때.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시장 입구에 접어들었을 때. 나열하는 동안에도 참 생뚱맞은 순간이구나 싶은데, 정말 그래요. 이런 순간들이 제게는 더 많은 아이디어들이 샘솟는 찰나인 것 같습니다. 노트북을 붙들고 한참을 씨름하다가 이내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때, 저는 그 자리를 떠나는 법이 없었거든요.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자리를 뜨기란 더 쉽지 않죠. 그러니 일단 마음먹어보는 겁니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더라도 머물던 공간을 벗어나기로요. 눈앞의 풍경을 싹 바꿔버린 후, 머리를 꽉 채웠던 생각들이 잠시 무르익을 시간을 준다고 해야 할까요.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가 봐요. 유튜브에 나오는 꽤 많은 크리에이터들도 딴짓을 할 때 좋은 영감이 떠오른다고 한 걸 보면요.


음, 또 어떤 게 있을까요? 오늘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따뜻한 호지티 라떼를 시켜두고 생각합니다. 이 장소에서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과감히 엉덩이를 떼어볼 참이에요. 어릴 적 살던 동네에 들러봐도 좋을 거 같고요. 움켜쥐고만 있던 손을 잠시 펴볼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갖는 것. 이 일을 하는 동안 무한히 넓혀볼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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