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절실했던 마음을 떠올릴 가장 쉬운 방법
침대와 끈질긴 사투를 벌이다 가까스로 버스에 몸을 실은 출근길. 등록되지 않은 낯선 이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한 문자는 한 번에 읽기 어려울 정도로 장문이었죠.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찬찬히 읽어보니 저보다 족히 10살은 어릴 어느 후배의 문자였습니다.
제 번호를 알게 된 경로와 불쑥 연락하게 된 이유, 대면으로 꼭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저는 잠시 고민에 휩싸였어요. 요즘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심한데 이런 상태로 만나도 될까. 제겐 좋지 않은 기억이 하나 있었거든요. 광고 꿈나무로 의욕이 마구 불타오르던 20대에 제가 너무도 가고 싶은 광고회사에 다니던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었죠. 광고 말고 할 수 있는 거 없어? 이 업계 진짜 별거 없어. 난 딴 거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이거 하는 거야. 너넨 빨리 다른 길 찾아라. 빈 잔에 가득 맥주를 채워주며 했던 말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도 꽤 오랜 기간 그 회사를 다니던 선배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지만, 아마 다른 일을 찾아 떠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창 밖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나의 물음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습니다. 지금의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든든히 배 채워 보내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회사 일정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회의 시간을 피하고 피해 후배와 아쉬운 만남을 갖게 되었죠. 얼굴을 아예 모르는데도 카페 문이 열렸을 때 한눈에 ‘저 친구구나’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눈이 너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거든요. 카페에서 제일 맛있다는 디저트를 잔뜩 주문한 우리는 서둘러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전공에 대한 고민부터 휴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광고회사는 정말 취업이 어려운 건지, 10년이 넘은 지금은 광고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 면접보다도 더 어려운 질문들을 쏟아냈죠. 간간히 저는 ‘잠깐만, 생각 좀 더 해보고 답해도 돼요?’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제가 건넨 답이 그다지 큰 영향력은 없겠지만, 어린 날의 저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죠. 대화를 나눌수록 제가 이 일을 왜 하고 싶어 했는지 점점 더 명확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수북이 쌓여버린 지쳐버린 마음이 깨끗이 거둬지면서 지난날의 절실했던 마음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어요. 선배의 따끔한 말 한마디보다 후배의 날카로운 질문 하나가 정신을 번쩍 차리게 만든 것만 같았습니다.
2시간 남짓 대화를 나눈 우린 아쉬운 인사를 나눴습니다. 두 볼에 닿는 선선한 바람에 또 한 번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실감하며 전보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회사를 향했습니다. 부디 이번 만남이 마지막이 아니길, 저 친구가 머지않은 미래에 저를 또 혼쭐 내러 와주길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