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무 좋아하지는 않으려는 노력

10화 : 오래 이 일을 좋아하기 위한 내면의 방어기제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다니는 동안, 가장 가깝게 지낸 동기와 1년 만에 만난 자리였습니다. 웹디자이너로 12년째 일하고 있는 그녀는 최근 골치 아픈 고민들을 털어놓았는데, 마치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닮아있었어요. 서로 하는 일의 결이나 방식이 비슷해서일까요? 자주 보지는 못해도 만날 때마다 진솔하게 털어놓은 생각들이 늘 비슷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제게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그래도 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잖아. 그런 일을 하면 덜 힘들 거고. 그게 부러워."


순간 머릿속에 지난 시간들이 마지막 영화 속 장면들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습니다. 인턴 때 처음 밤을 지새웠던 기억, 정말 잘 해내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아 끙끙댔던 기억, 기대조차 하지 않은 때에 너무도 기다려왔던 기회를 거머쥐었던 기억까지. 울고 웃었던, 내 삶에서 가장 선명한 색감으로 남아있는 장면들이 빨리 감기 하듯 후루룩 눈앞을 지나갔죠. 가끔은 항상 데드라인을 향해 달려야 하는 이 일이 버겁기도 했어요. 예상치 못한 회의 때문에 오래전에 잡아둔 중요한 약속을 깨야 하는 일이 너무 속상한 날도 있었죠.


"이 일이 여전히 재밌고 좋지만, 그 이유만으로 내 삶을 지나치게 쏟아붓진 않으려고 해."


이렇게 대답한 이면엔 사실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카피라이터란 마음 가는 대로 작품을 만드는 아티스트가 아니기에 여러 사람의 피드백을 받을 수밖에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수정을 해야 하는 때도 있다는 걸 냉혹하지만 받아들였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 내가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지.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라는 마음으로 일을 대하려면 스스로의 에너지를 조절할 필요도 있다고 느낍니다. 어느 이상 나를 쏟아붓고 나면 그만큼의 보상을 바라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일 테니까요.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와 비슷한 마음인 것도 같아요. 오래 함께 하고 싶은 만큼 미워지는 지점까지 집착하거나 나를 희생하진 말아야겠다는 다짐 같은 거죠.


이제 일을 시작할 때 제 마음에 심어두는 건 이거 하나예요.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가 아닌 '내가 이렇게까지 해봤으니 됐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 그게 일과 나 모두에게 가장 건강한 지점이란 사실입니다.



keyword
이전 09화중심잡기의 연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