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렁에 빠진 날들

by 보라구름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노트이건, 이곳 브런치이건 간에 어디에다가 뭐라도 끄적일 정도가 된다는 것은 그나마 상태가 꽤 좋은 것이라는 것을.


꽤 오랜 시간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단 한 줄도, 아니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몸이 아팠고(감기와 몸살, 편도선염), 과로를 했고(추가 휴일근무를 자청해서), 결과적으로는 허덕이며 지쳐갔다. 가침과 가래 때문에 숨 쉬는 게 불편해서 밤에는 누워서 잠을 잘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천식 환자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끔찍한 두통이었다. 죽도록 아픈 것은 약을 먹으면 좀 덜했지만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


약을 한 움큼씩 먹고 멍한 상태로 두통이 주는 불쾌함을 어쩔 수 없이 그저 견디며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일 조차도 힘들었다. 집중을 하기 어려웠다. 그냥 아무 채널이나 되는 대로 돌리면서 숨 쉬듯이 리모컨을 눌렀댔다.


연휴는 그렇게 지나가버렸다. 일하고, 아프고, 살아남느라 간신히 버텨냈다. 그리고 연휴 마지막 즈음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고, 예약된 상담은 어김없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30분의 시간 동안 내가 충분히 말을 했다기보다는 뭔가 본격적으로 말을 하려고 하면 시간이 끝나는 그런 느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짧다면 짧은 30분 동안 내가 하는 말 중에서 나도 처음으로 생각해보는 것들도 있다는 점이다. 내 안에서 나와서 타자에게 전달되는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을 일들. 친구나 가족 또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어려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법 비싼 치료비를 지불하고 상담을 받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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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으로 괴롭기는 했지만, 조금 다르게 괴로웠다. 생각이 많아서 잠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아파서 잠들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쪽이 더 나았냐고? 나을 리가 있나. 둘 다 똑같이 괴롭고 싫다. 하지만 독감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급성 질병이 아니라 기침이 심한 감기였기 때문에 굳이 비교하자면 감기로 아파 못 자는 게 차라리 나았다. 몸이 녹초가 되기 때문에 결국 약기운에 언젠가는 곯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더 이상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지 않아도 된다고 하자 의사는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그렇다고 내 불면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내가 수면유도제 처방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은 그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는 느낌이 너무 싫어서다. 마치, 기억의 한 뭉텅이가 강제로 잘려나가는 것 같았다. 잠을 자고 일어난 것은 맞지만 그 잠이라는 자체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마치 그 시간에 잠을 잔 게 아니라 다른 무얼 했다고 해도 모를 것 같았다. 피로가 풀리는 것도, 개운한 것도 아닌 이상한 잠, 강제로 끌어다 눕혀진 잠이었다.


요즘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언젠가부터 미래를 그리거나 꿈꾸지 않게 된 것 같다는 생각. 그게 실현 가능성이 있거나, 실제로 무엇을 하거나 간에 막연한 것이 아니라 제법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데 어젠가부터 그런 것들이 희미해지고 있다. 그렇게 지금은 점점 백지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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