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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현 Oct 30. 2020

제주에서 받은 내 인생 첫 팁

누군가의 삶을 응원해주던 소중한 마음을 기억하겠습니다

"누나 누나 일어나 봐, 누나한테 팁을 주고 가셨어"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나를, 게스트하우스 사장 동생이 부르길래 놀래서 거실로 나와 눈을 비비며 비몽사몽 한 얼굴로 사장 동생을 쳐다봤다. 무슨 영문인지 아직 잠에서 덜 깬 탓에 사장 동생의 말을 쉽게 믿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무슨 팁?"

"어제 게스트 분이 팁을 주고 가셨어 이거 봐 봐"


손글씨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놓은 편지와 만 원짜리 몇 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와 만 원짜리 몇 장을 보고 나서야 정말 내가 팁을 받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었다


제주에서 내 인생 처음으로 받은 팁 20,000원



편지를 쓰고 간 손님은 어제 게스트하우스에서 혼자 묵은 남자분이셨다


어제는 내가 일을 하는 날이 아니라 휴무였고, 제주에서 곧 육지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나를 위한 선물을 만들기 위해 자수를 배우고 돌아와 허기진 배를 채우며 같이 스텝 생활을 했던 언니에게 취업과 삶에 대해서 이런저런 넋두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언니 전 육지에 돌아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언니 저 육지에서 돈을 빨리 벌어서 다시 제주로 오면 어떨까요"


사실 두려움이 가득한 시기였다


28살, 이제 곧 29살이 되고 재취업을 할 수 있을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제 곧 제주의 삶을 마무리하고 육지에서 다시 직장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게만 느껴졌고, 나와 함께 생활했던 스텝 언니와의 대화를 게스트 분이 들으며 본인의 20대를 떠올리셨던 것 같다







우리 다 같이 밤 산책 가요


마음이 복잡할 때는 역시 밤 산책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제주 바다에도 어둠이 찾아오고 짙은 파도소리만 들리기 시작한다. 저 멀리 반짝이는 비양도를 바라보고, 마을길을 따라 포구 쪽으로 향했다. 언니는 한 손에 스피커를 들고, 나는 언니의 흥에 취해 god의 촛불 하나를 열심히 부르며 밤 산책을 했다                                                                                                                                         

                                              

지치고 힘들 땐 내게 기대
언제나 네 곁에 서 있을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내가 너의 손 잡아줄게

너무 어두워 길이 보이지 않아
내게 있는 건 성냥 하나와 촛불 하나 이 작은
촛불 하나 가지고 무얼 하나
촛불 하나 켠다고 어둠이 달아나나
저 멀리 보이는 화려한 불빛 어둠 속에서
발버둥 치는 나의 이 몸짓 불빛을 향해서
저 빛을 향해서 날고 싶어도 날
수 없는 나의 날갯짓

하지만 그렇지 않아 작은 촛불 하나
켜보면 달라지는 게 너무나도 많아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던 내 주위엔 또
다른 초 하나가 놓여 있었기에 불을 밝히니
촛불이 두 개가 되고 그 불빛으로
다른 초를 또 찾고 세 개가 되고 네 개가
되고 어둠은 사라져 가고

<god- 촛불 하나>


편지에 적혀 있던 장기자랑은 나의 촛불 하나와 넘치는 흥으로 고개를 앞뒤로 흔들었던 모습을 보고 적어주셨던 것 같다. 마음이 복잡하고, 두려움이 찾아올 때 힘이 되는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음이 감사했던 밤이었고 밤 산책을 함께 해준 이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던 밤으로 기억하고 있다


구름이 유난히 많았던 날, 반짝이는 비행기에게 인사하던 나


구름이 유난히도 많았던 제주의 밤하늘,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며 나도 곧 떠냐 한다는 사실이 한번 더 떠올라 손을 흔들었다. "안녕 비행기야, 나도 곧 돌아가야 하네"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내 마음을 안아주기 위해 제주에 왔다.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그렇게 세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번 제주를 망설이던 나에게 제주에 다녀온 뒤에 다시 힘을 내보면 어떻겠냐고 말해주었고 힘이 되어주었던 친구 덕분에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제주에 올 수 있었다. 친구 덕분에 용기를 내어 제주에 온 만큼,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육지에 돌아가고 싶었다


관계 속에서 파도가 쳐도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려 할 때 그 관계를 온전히 믿지 않고 나를 지켜 낼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회생활에서도 나에게 상처를 내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고, 온전히 나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되고 싶었다


이십 대의 나는 나 자신보다 타인의 마음을 우선시했고, 모든 관계가 진심일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누군가는 내 마음을 이용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진짜 내 사람이 되기도 했다. 때때로 관계 속에서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었고, 최선을 다한 관계 속에서도 상처를 받는 일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온전히 나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제주에서 과연 단단해졌을까, 제주의 밤하늘을 보며 세 달의 시간이 고요히 스쳐 지나간다


우리의 밤 산책 역시 고요하게 흘러갔다


우리는 수많은 말들을 뒤로하고 제주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나누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낯선 이의 인생을 응원해주던 고마운 마음을 기억할게요


육지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나의 넋두리를 누군가 기억하고 마음을 써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인연이었지만, 결국 내 기억 속에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게스트가 되었다


사실 사람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게스트하우스에서 근무하면서도 업무 적인 이야기 외에 사적인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았다


4년 전 제주에서의 삶은,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했을 때라 종종 마음이 맞는 게스트와 마주할 때는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4년 후 다시 마주한 제주에서 마주한 사람들에게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선 내가 사람에게 상처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혹시나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나의 질문 하나가 누군가에게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관심받는 일이 불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혹여나 불편할까 봐 혼자 온 게스트에게 인사만 건네고 내할일을 했을 뿐인데, 누군가는 스쳐 지나가는 이십 대의 넋두리에 마음을 써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고 따스한 응원 덕분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보자고 다짐했던 날이었다




이십 대는 삶은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는 시간들이었고, 한번 넘어졌다고 해서 영원한 실패자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배울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이십 대의 나는, 오랜 시간 돌에 걸려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밀며 괜찮냐고 물어봐주지는 않을까 그리고 나의 상처를 치료해 주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날들 속에서 누군가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가 가득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면 실망이라는 마음 또한 함께 안고 살아가게 될 테고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조용히 미워하게 될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떠올렸다


이제는 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줄 것을 기다리고 기대하지 않는다.


상처 받은 마음을 가장 먼저 알아봐 줄 사람도,

상처를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는 용기를 내보자고 다독여 줄 사람은 유일한 사람은 나니까.







그날 밤의 넋두리 그리고 오늘의 나


그날 밤, 거실에서 했던 넋두리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육지에 돌아가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육지에서 삶을 채워나가야 할까, 돈을 모아 다시 제주에서의 삶을 채워 나가야 할까. 사실 제주에서 살고 싶으면서도 진짜 제주에 와서 살 용기를 내는 건 어려웠다


나에게 가장 위안이 되어주는 이 섬에서 살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세 달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육지로 돌아와 또다시 육지에서의 치열한 삶에 적응해가고 있다. 주 5일 출근을 하고, 퇴근 시간을 기다린다. 여전히 제주를 그리워하고 애정 하며, 일 년에 몇 번씩 제주의 안부가 궁금해 제주로 떠나는 삶을 살고 있다


낯선 이의 따스한 응원을 받던 이십 대의 삶에서 이제는 삼십 대의 삶이 되었고,

오늘의 무탈하고 소소한 삶에 감사하며 누군가의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출근하는 날에는 철저하게 회사원이 되고, 휴무날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다채로운 풍경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계절을 따라 여행을 간다. 누군가 읽어줄지 모르는 글이지만 소중한 내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고,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 안부를 전하는 일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제주에서 받은 내 인생 첫 팁을 주신 게스트 분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싶다.


제주의 어느 날 밤, 넋두리를 하던 이십 대 소녀는 육지에서 오늘이라는 시간을 나를 위해 채우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다정한 응원 덕분에 제주에서의 소중한 마음을 선물 받았고, 나는 그 마음을 오랜 시간 기억하며 용기를 내며 살아가 보겠다고 말이다.


다정한 응원 덕분에 나는 또 살아갈 용기를 내본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따스한 응원 덕분에 나는 또 오늘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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