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잘 해내고 싶었던 첫 경험, 그 경험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마음을 배웠던 것일까
물음표가 가득했던 순간들.
내가 경주에서 했던 업무는 수학여행 인솔자였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오는 초등학교 한 반의 담당 인솔자가 된다. 2박 3일 동안 함께 합숙을 하며 숙소에서의 안전 관리부터 시작해서 유적지의 인솔과 유적지 설명까지. 수학여행 2박 3일의 완벽한 책임자가 되어야 했다
우리는 생각보다 빡빡한 일정에 육체적으로 피곤함을 늘 달고 살았다
하루 일과는 늘 아이들과 함께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을 깨우고, 아침을 먹고 오전 일정을 진행한다. 오전 일정 후 다시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다시 더 빡빡한 오후 일정을 진행한다. 오후 일정이 끝나면 긴장이 슬슬 풀리기 시작하는데 이건 끝이 아니었다. 다시 저녁을 먹고 야간 유적지 탐방을 가고 마지막 날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레크리에이션으로 2박 3일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마무리를 하는 일정이었다
몸이 힘들수록 마음의 무게도 점점 무거워졌다
2박 3일 동안 안전사고가 생기지 않아야 했기에 더욱 예민해졌고, 아이들 간의 싸움도 비일비재해서 나 역시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 되어야 했다.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아이들의 안전 관리를 하다 보니 좋은 선생님 이기 보다 소리를 질러야 하는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나는, 늘 물음표가 가득한 상황이었다.
첫 동료들과의 관계는 설렘도 가득했지만 물음표도 가득했다
공통점은 하나도 없는 우리는 어떤 이유로 한 공간에 모이게 되었을까. 각자 다른 마음가짐으로 이곳에 모이니 물음 표가 가득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좋아서 이곳에 왔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우리의 마음은 서로 닿을 듯 닿지 못했던 것 같다.
22살의 소극적이었던 나는, 내 마음을 숨기는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가끔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 이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대화도 있었지만 나는 팀에서 막내였기에 일단 좋은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주어진 업무에 온 힘을 다 쏟고 있었다
그럴 거면 집으로 돌아가.
월요일 점심에 첫 학생들이 오고 수요일 점심에 돌아간다
곧바로 수요일 점심에 새로운 학생들이 오고 금요일이 되면 돌아간다
금요일의 일정을 마치고 토요일 저녁을 먹고 있던 중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네 맘대로 할 거면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가 일하던 곳은 사장님이 두 분 이셨다. 한쪽의 첫 번째 사장이 인솔자들을 담당하여 관리했고, 두 번째 사장은 장소만 제공하며 인솔자들을 지원받아 운영하는 곳이었다
두 번째 사장님의 일터에 인력이 모자라 내가 그쪽으로 지원을 가게 되었다
두 번째 사장님의 스케줄에 맞춰 근무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스케줄이 비는 날이 있었는데 첫 번째 사장이 자신의 일에 지원을 오라는 것이었다. "저는 두 번째 사장님의 스케줄에 맞추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 한마디가 그에게는 큰 화가 되었다.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자르려고 했던 것이다
경주에 연고가 없던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전화를 끊고 눈물이 흐리기 시작했다. '내 질문이 잘못된 것일까?' 고개를 끄덕이는 일에 익숙했지만 처음 접한 부당한 대우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최선을 다해서 업무에 임했지만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이야기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뿐이라니. 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엄마에게 전화를 할 수 없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나를 달래 주기 시작했다
곧바로 두 번째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네 월급을 줄 테니 우리 쪽에서 일하는 걸로 하자" 곧바로 짐을 싸 두 번째 사장님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부당한 대우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질문을 하면 누군가는 화를 낸다는 것을 말이다.
두 번째 사장님이 있는 곳에서 일을 했지만 큰 학교가 입소를 할 때면 첫 번째 사장과 두 번째 사장이 함께 일을 했다. 경주에 연고가 없던 나를 다시 집으로 보내버리려던 첫 번째 사장은 늘 나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쳐다본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간다면 훗날에 나를 원망할 것만 같았다. '할 수 있어! 당당하게!' 그럼에도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당당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따스했던 봄을 마무리하고 나는 다시 경주에 내려갔다
가을 수학여행까지 마무리하고 겨울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던 경주에서의 첫 시작이 쉽게 끝나 버릴 뻔했지만 두 번째 사장님 부부 덕분에 경주에서의 첫 경험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는 경주에서 부당한 경험도 했지만 따스한 어른들을 만나 어른들의 책임감을 배우기도 했다. 따듯했던 집을 떠났던 기억, 22살의 나는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마음들을 가득 담아 올 수 있었던 건 어른들의 다정함 덕분이었다
경주의 봄, 나에게 고맙다.
여전히 따스한 봄이 되면 경주를 찾곤 한다
그리고 짐 가방을 하나 들고 경주역으로 떠나 온 22살의 나를 떠올리곤 한다
그저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경주에 왔지만 경주 살이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새로운 공부를 해야 했고, 하루하루가 책임감의 무게로 짓눌려 체력은 자주 바닥났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서로 예민해지는 날도 있었고, 내 맘 같지 않아 한숨을 푹푹 쉬며 일을 한 날들도 있었다
흐린 날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잘 마무리 해준 나에게 고마운 마음뿐이다
덕분에 오늘까지도 경주 살이를 추억하면 안 좋은 기억보다 좋은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르곤 한다. 쉽지 않았던 날들이었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던 22살의 내가 자랑스럽다. 낯선 타지에서 홀로 스스로를 책임 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첫 경험, 포기하지 않고 잘 마무리 해준 나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다
사회초년생, 우리는 누구나 사회초년생이었다
유독 사회초년생 시절에는 모든 게 서툴고 어떤 소리도 함부로 낼 수 없었다
사회에서 쌓인 데이터가 없었기에 어찌할 바를 몰라 늘 안절부절못하며 에너지는 늘 고갈되었다. '이런 게 어른의 삶인가?' 묵묵히 우리를 지켜주시던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되었다
뚜벅뚜벅, 여전히 어른의 삶을 묵묵히 걸어가는 중이다
여전히 물음표가 가득한 세상 앞에서 경주살이의 첫 경험을 자주 떠올린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을 때면 22살 경주로 떠났던 나에게서 용기를 배우곤 한다. 내 첫 경험, 경주 살이는 나에게 새로운 마음들을 깊게 배울 수 있는 단단한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살다가 첫 경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무한한 용기를 보내곤 한다
'할까? 말까?' 하는 이들에게 일단 해봐도 좋다고 말해 주곤 한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라면 일단 해보고 후회하는 일이 나에게 더 깊은 배움을 안겨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첫 경험, 첫 시작을 늘 응원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첫 시작은,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보면 어떤 경험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진 경험이 되어 있을 테니까.